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옥매원玉梅園의 밤

洪 海 里 2019. 1. 1. 18:59

옥매원玉梅園의 밤

洪 海 里

 


수천수만 개의 꽃등을 단 매화나무가 날리는 香이 지어 놓은 그늘 아래

꽃잎 띄운 술잔에 열이레 둥근 달도 살그머니 내려와 꽃잎을 타고 앉아 술에 젖는데,

꽃을 감싸고 도는 달빛의 피리 소리에 봄밤이 짧아 꽃 속의 긴 머리 땋아내린

노랑 저고리의 소녀가 꽃의 中心을 잡아,

매화를 만나 꽃잎을 안고 있는 술잔을 앞에 놓고 부르르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있는
詩人들,

차마
을 들지도 못한 채 눈이 감겨 몸 벗어 집어던지고.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수천수만 개의 꽃등을 단 매화나무” 아래 “향香”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 극진한 아름다움의 순간, “꽃잎 띄운 술잔에 열이레 둥근 달”이 비친다. 달도 아름다움에 취해 꽃잎을 타고 놀다 술에 젖는다. 이 한 폭의 그림에 대한 설명은 그야말로 ‘吟風弄月’ 혹은 ‘無爲自然’이라는 낯익은 주석으로 충분해 보인다. 술과 꽃과 달과 피리, 거기에 “노랑저고리의 소녀”까지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은 완벽한 풍류의 세계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앞에 두고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마는 “시인詩人들”이 있다. 자연에 도취되어 ‘無我之境’에 이른 것일까? 아니라면, 이제는 너무나도 흔해빠진 것으로 이해되는 자연과 인간의 일체를 결곡한 언어로 형상화했다고 해야 옳은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연에 기대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낡은 것이지만 자연 그 자체는 낡은 것이 아니다. 자연이 낡을 수는 없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자연이다. 자연을 빌미로 감정을 풀어놓는 시인의 안이한 태도가 낡아빠진 것이다. 언제나 그것이 문제가 된다. “수천수만 개의 꽃등”은 자연에 대한 낡은 비유에 대한 역설적 사유가 낳은 아름다움에 대한 비유다.

물론 그 아름다움의 한가운데 꽃이 있고, 그 꽃의 한가운데 소녀가 있다. 소녀는 시인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을 망각하는 것을 제어하듯이 일자(一者)의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는 꽃의 “중심中心”을 잡는다. 여기서 “중심”이란 말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환상일 수 없다.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를 치게 하는 어떤 힘이다. 아니 그 “중심”에 있을 때, 우리는 “진저리”를 치게 된다. 다시 말해, 무아지경의 저 낙락으로 함몰될 위기에 처한 시의 언어를 구하려는 “시인들”의 악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수천 수만 개의 꽃등”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피울 수 있는 가장 힘겨운 꽃이다. 홍해리의 시집 『봄, 벼락치다』에서 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의 “수천수만 개의 꽃등”에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되는 것은 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놓는 언어의 유연함이다.

  - 여태천(시인)


* 매화나무와 향, 꽃잎, 달빛, 시인들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곳이 다름 아닌 ‘술잔’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술잔이란 인공적인 산물이다. 술잔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경지를 보여주는「옥매원의 밤」은 자연 속에서 풍류와 멋을 즐기는 홍해리 시인의 시정신의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위의 시에서 ‘꽃의 중심을 잡’고 있는 소녀는 주석의 분위기를 더욱 신비롭고 황홀하게 하는 존재이면서 시인과 자연의 중매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인공적인 사물인, 매화꽃잎이 떠 있는 술잔은 그 자체로 봄의 모든 신비로운 기운이 녹아 있는 자연이 된다. 그 잔을 ‘차마 들지도 못하고’ ‘몸 벗어 집어던지’는 시인들도 자연이 된다. 이처럼 자연이 배경이 될 때에는  자연을 완상하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멋과 풍류를 노래하는 경향을 보인다.

   - 신현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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