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추억, 지다

洪 海 里 2019. 1. 1. 19:08

추억, 지다

洪 海 里

 


한여름 다 해질녘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꽃을 따 누이의 손톱마다
고운 물을 들인다
이쁜 반달손톱 속에는 벌써
첫눈이 내린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이 내린다
추억이 짓는 아스라한 한숨소리
손톱 속으로 스며들고
손가락 꼭꼭 싸맨 그리움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해 설핏한 저녁에 꽃물을 들이는
눈썹마당에 이는 바람인 듯
슬슬슬 어스름이 내릴 때
가슴속에선 누가 북을 치고 있는지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입술 촉촉 젖어 살짝 깨무는 소리
어스레한 누이의 젖은 눈가로
봉숭아꽃 하나 둘 지고 있었다.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봉숭아 꽃물”로 비유되는 추억에 대한 감정이 다양한 언어의 운용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추억, 지다’라는 단순한 제목은 얼마나 아련한가. 그러나 시인은 그 감정에만 기대지 않는다. 누이는 첫눈이 내릴 때까지 그 꽃물이 남아 있기를 바랐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이 “꼭꼭” 싸맨 손톱 사이에 스며 있는 “봉숭아 꽃물”처럼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그 간절함과 그리움은 영원하지 않다. “슬슬슬 어스름이 내”리는 것처럼 그 절실함도 저녁 무렵 마당에 부는 바람이 되어 누이의 가슴을 싸늘하게 식히고 빠져나간다. 그러나 어디 쉽게 잊혀질 수 있겠는가. 누이의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은 또 다시 “스멀스멀 스며”든다. “꼭꼭” “슬슬슬” “스멀스멀” 등과 같은 의태어는 마치 그 감정이 살아서 시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추억추억”이라는 관념어의 중첩은 첫사랑에 대한 누이의 애틋한 감정이 이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록, 그리움이 손톱 끝에 남아있지만 그것은 실현될 가망이 없는 사랑에 대한 증거에 가깝다. 누이의 아픔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우리의 감정이 관념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종종 홍해리 시에서 언어는 감정의 저 깊은 곳을 울리고 매우 건조하게 시의 표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 여태천(시인)


* 꽃물이 손톱 끝에 닿으면 그리움은 더 짙어진다. 저녁놀 넘어갈 때 한 번 더 붉게 물드는 것처럼
산을 넘는 첫사랑이 진하고 진하다. 꽃물 들이고 첫눈 올 때까지 그리움을 보내는 동안 붉은 입술과
하얀 피부와 맑은 눈동자는 그렇게 지면서도 선명하다.

   이제 나는 사랑이 스며든다는 말을 알겠다. 사랑이 물들었다는 말을 쓸 때 내 몸은 이미 젖어서
고운 색깔을 내는 것을 알겠다. 이 추억이 몸에서 빠져나가려면 내게 들어온 간절한 시간만큼
돌아보며 머뭇거릴 것이다. 아직 첫눈은 오지 않았다.
   - 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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