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자벌레

洪 海 里 2019. 1. 1. 13:44

 

 

자벌레 

 

洪 海 里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山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의 산이다.


 

 

 

시 읽기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이다. 중간 쌍의 다리가 없어 가늘고 긴 원통형 몸으로 앞부분을 쭉 뻗은 후 꽁무니를 머리 쪽으로 당겨 올리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움직인다.

제 몸의 길이를 다하는 걸음 걸음이 마치 자로 길이를 재는 듯한 모습이기도 하고,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쌓았다 무너뜨리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삶은 움직임이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어떤 절명의 한순간도 건너 뛸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자로 재면 잴수록 질곡의 수렁 속에 빠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한평생을 자로 재어가며  잘 살고 잘 살아야 하지 않는가.

 

 걸음걸음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쌓았다 무너뜨리는 저 조그만 자벌레도

그 이상은 더할 수 없을 정도의 지극한 삶, 그 무등無等의 산을 넘고 있는 것이다.

  -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

    

<감상>

자벌레를 본다.

저 자그마한 몸뚱어리로

푸른 산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벌판을 만든다.

몸 자체가 길이고 강이고 시간이다.

구부리면 산이 되고

쫙 펴면 길게 뻗쳐 지평선이 된다.

작은 몸속에 도사린

우주를 발견한 시인의 눈,

끊임없이 쌓았다 무너뜨리는

자신의 시의 산을

'자벌레'로 은유했으리라.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저 꾸물꾸물한 움직임은

그 얼마나 순정하고 맑고 눈물겨운가?

無等의 산속 오솔길은

또 얼마나 그윽하고 향기로운 것인가?

그 어딘가 숨어있는 옹달샘은

또 얼마나 새콤달콤할 것인가?

아무도 몰래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푸른 잎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쬐끄만 자벌레들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으리라.

구불텅구불텅한 갈지자로

혹은 상쾌하고 신나는 둥근 산의 모습으로

가벼운 날갯짓으로

비상할 날 꿈꾸면서...

 - 나병춘(시인).


<감상>

* 잰다는 말에 오래 머뭇거린다. 더구나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일이라니.

이제부터 내가 걸어온 흔적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아니 지금부터 세상을 신중하게 건너라는 숙제를 받은 셈이다.

내가 짚는 공간에 진짜로 접촉하는, 몸 한 토막이 귀하게 여겨진다.

더는 토막 낼 수 없는 몸이기에 내 몸 전부가 한 토막이 되어 잰다, 던진다.

한 번은 꿰고 한 번은 덜고, 살아 있는 동안 반복이다.

   나는 사실 절대적 눈금을 가지지 않았다. 그날 몸 상태에 따라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육신의 자도 그렇고 생각의 자도 수시로 변한다.

고요 한쪽이 몸을 누르다가도 금세 수런수런 일어나기 일쑤다.

그러고 보면 나는 세상을 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재는 일과다.

쌓았다가 내려앉는 일이 겨우 내 몸 변화를 감지하는 짓이어서 부끄럽다.

이것도 귀찮으면 내게 부여된 세상도 끝이다.

    - 금 강.


   * 4연 8행의 형식에 한 연은 2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4연은 기승전결의 구조로 시에서 가장 많이 차용되는 형식이며 1연 2행으로 이루어진 형식은 정지용과 청록파의 초기시에 많이 보이는 것으로 시의 운율성을 살리고 의미의 통일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벌레’는 서정적 자아의 투사물이다. 1연과 2연은 자벌레의 운행을 시인의 시작과 연관지어 비유적으로 나타냈다. 자벌레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앞으로 나가는데 수축할 때는 ‘산’처럼 몸의 중앙이 솟아오르고 이완할 때는 평지가 되는 것처럼 몸을 ‘무너뜨리며’ 간다. 시인도 시를 쓸 때는 자신의 온몸을 바쳐 한 편의 시/산을 세우는 것이며 다음 시를 쓸 때는 다시 자기가 쓴 시를 무너뜨려야만 새로운 시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자벌레가 자신의 몸길이만큼 앞으로 나아가듯이 시인도 자신의 ‘온몸으로 세상을 재’며 ‘한평생’ 시를 써왔다. 산은 시인이 평생을 쓴 시이다. 그 산/시는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몸속’에 ‘무등無等’의 형태로 존재한다. 무등이라! 시를 온몸으로 쓴다고 한 김수영 시인도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리라. 감히 온몸으로 시를 쓴다고 선언하기도 힘든데 온몸으로 쓴 시를 선생은 ‘무등’이라고 정의한다. 시/산과 시 아닌 것/평지의 경계가 사라지는 놀라운 순간을 나는 이 시에서 목격한다.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본질을 담고 있지만 정작 시인은 그 속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지은 집을 끊임없이 허물고 새로운 집을 향해 가는 게 시인된 자의 숙명임을 아는 시인이 얼마나 되는가. 더군다나 그것이 무등이라면 이미 선생은 무애无涯의 경지에 든 것이란 말인가.

   - 신현락(시인)


이 시를 읽으니 제가 썼던 그 많은 시와 말들이
다 부질없어졌습니다.
과연 시란,
산을 만들었다 허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내일 모레 투표일에는
모처럼
무등을 올라보고 싶습니다.
거기 가서 또 선생님 시 생각하겠지요.
저 혼자 무등에 가서
무등같은 시를 읽겠습니다.

  - 고성만(시인).




자벌레 / 林 步

순례의 길을 가는
라마의 禪僧처럼
어느 聖地를 향해
그리 바삐 가시는지
袈裟도 걸치지 않은
저 푸른 몸매
一步弓拜 一步弓拜

* '이천십년 초가을에 임보가 자벌레를 그리고 쓰다.'라 하고
낙관을 찍은 시화를 칠순 기념으로 받다.(2010.10. 1.)
- 隱 山.


* 이 시는 4단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임보의 말마따나 언어의 절제미를 살린 4단시이다. 이 시의 1, 2연을 보면 자벌레가 기어가고 있다.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가 허물고, 다시 쌓았다가 스스로 허문다는 자벌레의 무한 반복의 생명 현상을 보여 준다. 이것이 자벌레의 존재 실상이다. 이 실상을 바라보며 시인은 자벌레의 존재 의미를 사유한다.

  자신의 몸으로 산을 쌓았다가 허물고, 다시 쌓았다 가 허무는 행위는 시시포스의 신화를 연상케 한다. 시시포스는 저승에서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데, 그 바위가 정상에 다다르면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영원한 형벌을 되풀이한다. 알베르트 카뮈는 그가 떨어질 줄 알고도 바위를 밀어 올린다는 것과 밀어 올린 바위가 굴러 떨어졌을 때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인간 승리라고 평가했다. 시시포스가 정상에 바위를 올리는 과업을 목표라 한다면, 그것이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유보당하고 있다. 자벌레 역시 자신의 몸으로 산을 만드는 것을 목표라 한다면, 그의 경우에는 자의에 의해 그것을 스스로 유보하고 있다. 자벌레의 경우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허무의 초극으로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자벌레 스스로 목표를 유보하는 자발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도자기를 굽는 도공이 가마에서 막 구어낸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절대적 미감에 의해 과감히 깨뜨려버리는 행위와도 같다. 또한 어렵게 정상에 오른 산악인이 스스로 내려오는 행위와도 같다. 그가 만약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머무른다면 정상의 깃대는 될지언정 이후의 가치 있는 삶을 연장할 수 없다. 그들은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르고, 내려오기 때문에 다시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대부분의 예술 행위도 마찬가지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고, 한 권의 시집을 상재한 뒤 그것에 만족하여 머무른다면 더는 가치 있는 예술 행위를 연장할 수 없다. 스스로 이룩한 목표를 자발적으로 해체하지 않고서는 예술은 한  발짝도 진전할 수가 없다. 

  자벌레가 애써 오르고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존재 실상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은 그 의미를 둘로 나누어 3, 4연에서 언급하고 있다.

  3연은 자벌레의 존재 실상에 대한 외적 의미로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행위’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재다’라는 말은 ‘측정하다, 측량하다, 계량하다, 계측하다, 헤아리다, 비교하다, 견주다, 분석하다, 판단하다’ 등등의 유의어로, 자신이 척도가 되어 자신의 인식 범위 안에서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삶을 영위함을 말한다. 자벌레는 일평생 자신이 측정할 수 있는 삶만큼 살아갈 뿐이며, 시인 또한 자신의 척도에 의해서 자기 삶의 범위 안에서 생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재는’이란 말은 인간의 이성적·감성적 판단하에 영위되는 지상적 삶을 말함이며, 구체적으로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를 일컬음이다.

  4연은 자벌레의 존재 실상의 내적 의미인 ‘무등無等의 산’은 무엇을 말함인가? 전라도 광주에 가면 무등산이 있다. 시의 경계 안에 우뚝 솟은 산으로 그 안에 입석대며 서석대 등의 비경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서 보면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들이 마치 무덤을 이루고 있는 듯하여, 미당未堂의 대표작 「無等을 보며」에서도 죽음의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다. 원래 ‘무덤산’이었는데 ‘무등산’으로 변했다는 속설도 있다. 아무튼 광주 사람이 사랑하는 무등산은 평등주의이다. 잘났든 못났든 사람은 모두 죽음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무등無等의 산’은 평등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무등無等’이란 ‘차별이 없다, 계급이 없다’라는 의미보다는 ‘무애무득无涯无得’의 경지를 말한다. 자벌레, 즉 유한한 존재가 자신의 삶을 마칠 때까지 가는 길에 막힘이 없고,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는, 오로지 본성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부조리한 존재 실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인간 실존의 모습이 바로 ‘무등의 산’이라 할 수 있다. 

  시「자벌레」는 홍해리 시인의 자화상이다. 그는 이 지상의 유한한 찰나적 존재로서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 지상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상적 삶이라는 허무의 실상에 맞서 언어의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무등의 산으로 허무를 초극하려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실로 자신의 존재 실상에 대한 명쾌한 외적, 내적 존재 의미를 이 짧은 시 한 편에 피력하고 있다.   

- 임채우(시인 ·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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