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 찔레꽃

洪 海 里 2019. 1. 6. 06:05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 찔레꽃
 
洪 海 里


 
너를 보면 왜 눈부터 아픈 것이냐

흰 면사포 쓰고
고백성사하고 있는
청상과부 어머니, 까막과부 누이

윤이월 지나
춘삼월 보름이라고
소쩍새도 투명하게 밤을 밝히는데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그 향기에, 빛깔에, 환심장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찔레꽃의 계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늦은 봄 들녘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는 찔레꽃, 가시는 왜 또 그리 날카롭고 많았던지 땔감으로 쓸 엄두도 못 냈고, 그래서 봄마다 더 무성히 들녘을 수놓곤 했었지요. 아마 지금쯤은 흰 꽃잎도 노란 꽃술도 장맛비에 다 이울고 겨울날 새들을 위해 열매들 살찌우고 있겠지요. 
 그 찔레꽃이 한때 저에겐 배고픔의 꽃이기도 했습니다. 햇보리는 아직도 들녘에서 푸른 이삭으로 서 있어 쑥 범벅이나 수리취 범벅으로 시장기를 삭이던 보릿고개 시절, 찔레덤불은 달금하면서도 삽미澁味가 받히는 찔레 순으로 우리를 유혹하곤 했었지요. 늦은 봄 해는 길어 배고픈 하학 길은 더더욱 더디기만 했고, 그러다 찔레덤불이라도 만나면 우루루 몰려가 웃자란 것이거나 덜 자란 것을 가릴 것 없이 다투어 찔레를 꺾곤 했지요. 그게 무슨 요기 거리라도 되는 양 순도 꽃잎도 다투어 먹곤 했었지요.
 하지만 또 한때 찔레꽃은 혼백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정말이지 달밤에 만나는 찔레꽃 덤불은 사뭇 무서운 것이었는데요, 어쩌면 그것이 흰옷을 입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산야를 피로 물들인 한국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 산기슭엔 여기저기 공동묘지가 생겨  났고, 때로 흰옷을 입은 여인들이 그곳을 눈물로 서성이곤 했으니까요. 죽음이 많았던 전쟁 공간, 무서움이 많은 어린 나이의 우리들에겐 귀신 얘기도 많았었지요. 그러니 공동묘지와 흰옷 그리고 흰 달빛의 정황 속에서 찔레꽃 덤불을 죽은 자의 혼령인 양 무서워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든 이후 저에겐 찔레꽃 덤불에 대한 또 하나의 영상이 겹쳐 있습니다. 
 저에게도 목이 먼저 메는 찔레꽃의 환영이 있습니다. 평생을 농사일로 살다간 어머니의 환영, 하얀 머리에 흰옷을 입고 동구 밖 멀리 시선을 모은 채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 찔레꽃에 겹치는 생각은 아득히 어머니에게로 이어지고 또 그 어머니의 나라, 고향에로 이어지곤 합니다. 찔레꽃은요, 그래서 제게 있어 또한 그리움의 꽃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리움의 끝자락에서 저는 다시 이 시를 읽습니다. “너를 보면 왜 눈부터 아픈 것이냐”라는 찔레꽃을 향한 원망의 표백을 마치 제 체험인 양 반추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 속에 이 시의 비극적 정서는 남김없이 담겨 있는데요, 무의식의 심층에서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순수 기억이 그런 반사행동을 유발하는 것이겠지요. 그 사연에 대하여 이 시의 화자는 “청상과부 어머니, 까막과부 누이”라고만 하고서 더 깊은 속사정을 덮어두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보다 세심한 헤아림이 필요할 것 같군요. 단순히 가족사의 비극을 암시적으로 얘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 이상의 계산된 노림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소월이 그의 시 ‘접동새’에서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말입니다. 소월은 이 시에서 민담 속의 인물을 처음엔 아홉 오라비의 누나로 얘기하다가 이 대목에 와서 화자의 누나로 바꿔 버리지 않습니까. 혹시 홍해리 시인도 그와 유사한 어떤 의도에서 청상과부, 까막과부를 화자의 어머니와 누이로 등장시킨 의도가 엿보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함께 안고 있는 민족적 비극성을 시인이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 것이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땅에는 주어진 목숨 다하지 못하고 초개같이 쓰러져 간 생명들이 너무도 많았지요. 끊임없는 외침 앞에서, 대동아전쟁에서, 동족 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에서 또 월남전쟁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희생되지 않았습니까. 또 그뿐만도 아니었지요. 자연의 재난 앞에서, 이런저런 사고 앞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공사현장에서…… 푸른 목숨들이 사라져 가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쪽은 으레 바깥일을 담당한 남자들이었구요. 그 비명非命의 슬픔은 죽은 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살아남은 자의 것으로 남아 있구요. 아마도 그런 죽음과 찔레꽃이 가장 근년에 마주친 것은 육이오전쟁이 아닐까요. 전쟁이 발발한 시점을 우리는 잊지 않으려고 기념 행사를 해 왔고, 그 육이오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오뉴월엔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또 망자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흰옷 차림으로 고인의 유택을 찾아 나서고……. 특히 미망인이 된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하고, 슬픔은 한 슬픔을 넘어 우리 겨레 모두에게로 흘러오고……. 홍해리 시인은 그런 민족적 비애를 ‘어머니와 누이’로 지칭하여 자신의 가슴속에 통과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저 찔레꽃 덤불은 정원에 소담스레 피어오른 것보다는 호젓한 들길에 피어 있는 것이 더 슬프게 우리 가슴으로 다가오겠지요. 아니, 낮은 벼랑에서 바다를 향하여 그 찔레꽃 덤불이 피어 있다면 더더욱 애상미를 유발하지 않겠습니까. 
 홍해리 시인의 찔레꽃을 두고 민족적 비극성의 자아화라고 생각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춘삼월 보름이라고/소쩍새도 투명하게 밤을 밝히는데”라고 하면서 우리 문학의 관습적 상징이 되어버린 소쩍새를 끌어오는 대목입니다. 촉 나라 망제望帝의 혼이라 하여 귀촉도歸蜀道 귀촉도라 운다는 소쩍새, 앞에서 얼핏 보고 지나쳤던 소월의 ‘접동새’도 그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홍해리 시인은 다층적 의미의 꿍꿍이속으로 찔레꽃을 형상화함으로써 우리를 애상의 심연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 김삼주(시인)


  * 지난 3일 동안 비가 내리고, 30일 일어나니 활짝 개어 있었다.
바깥은 따뜻하고 실내는 선선하다. 이만하면 쾌적한 편이다.
찔레꽃이 산방 화단 아래 둔덕에도 피어 있고, 운동장 울타리엔
여기저기 무더기로 활짝 피어 환하다. 빗 속에서 피어났으니
목욕재계한 모습이겠다. 그냥도 맑은데 더 깨끗해 보인다.
산막골엔 찔레가 많다. 온 동네가 찔레 향기에 감싸인다.

  예전 추억을 떠올리며 찔레순을 꺾어 얇은 껍질을 벗기고 맛을
본다. 달착지근하다. 특히 배고프던 시절에 심심풀이였다. 서민의
애환이 절절이 스며있다. 그래선가 이 시대에도 장사익이 부른
구성진 울림의 찔레꽃 노래는 인기곡이다.
  이미 1930년대에 김말봉은 찔레꽃이란 신문 연재 소설로 낙양의
지가를 끌어올렸다. 시는 많은 시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쓰여졌다.
동요도 있다. 찔레꽃이란 이름의 아침드라마도 방영되었다.


몇 번 뵈온 적 있는 홍 시인의 시에 찔레꽃 정서가 흥건히
녹아 있음을 본다. 장사익의 노랫말도 '슬퍼서 울었지'라고
반복되듯 시든 소설이든 드라마든 슬픔이 주조를 이루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6,25전쟁을 치룬 후 미망인들의 소복은 슬픔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되기도 했다. 더불어 어머니와 누이를 떠올리면
애잔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상처받아 가시를 세웠어도
이제는 찾아보기도 어려운 때묻지 않은 순정이 그 안에 서려 있다.

  찔레꽃은 어둡거나 무거운 이미지는 아니다. 희고 밝아서 명랑하다고
노래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슬픔과 상처, 그리움과
아픔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배고픔도 있다. 홍시인도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고 묻는다. 슬픔에 환하게를 접목함도 한걸음 나아간 표현일
터이다. 이성간의 사랑, 가족애도 담겨 있다. 전설은 슬픈 가족애를 전한다.

  고려시대 몽고족에 공녀로 끌려간 찔레라는 소녀가 다행히 좋은 사람만나
행복했으나 헤어진 가족이 그리워 십여 년 만에 고향에 와 흩어진 가족을
찾다가 상심에 지쳐서 죽었고, 그 자리에 피어난 꽃에 소녀의 이름을 붙여
찔레꽃이라 부르게 됐단다. 최영희 시인은 '그리움은 가시가 되고 / 마음은
하얀 꽃잎 / 눈물은 빨간 열매 / 그리고 애타던 음성은 / 향기가 되었네'
라고 읊었다.

  1941년에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은 긴 세월을 뛰어넘어 식지않고 그 사랑이
여전하다. 겨레 애창 가요의 대표격으로 가요무대에서 가장 자주 불린 노래 중
하나라고 한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으로 시작되는
찔레꽃 노랫말은 그만큼 유명하다. 왜 찔레꽃이 붉으냐는 물음표에 온갖
해석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산막골에도, 드물지만 붉은 찔레꽃이 있다.
처음 봉오리가 맺힐 때부터 갓 피어났을 때 붉은 빛을 띄는 것을 눈여겨
본다면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아예 분홍빛인 것도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단심을 표현한 거라는 풀이도 가능하겠지만 사실성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아름다운 모습처럼 밝고 따뜻하며 깨끗한 이미지가 아롱지는
소재로 태어나도 좋으련만 슬픔의 관성을 벗어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듯싶다.
장미목 장미과에 속한 찔레꽃이니 한국의 들장미로 불리워도 되겠다. 갓 시집온
새색시를 닮았다거나 환한 웃음으로 보거나 슬픔은 이제 지워져도 좋으리라.
걸으며 눈길이 가는 곳마다 순결하게 피어나 반긴다. 한 겨울 붉은 찔레 열매는
또 얼마나 찬가슴을 데워주던가. 그리움을 부르는 꽃, 그 짙은 향기와 더불어
그리움도 널리 퍼져나갈 것이다. 찔레꽃에 기울이는 사랑이 더욱 커져가는
초여름이다. 찔레꽃에 둘러싸인 산막골을 더 애착이 가게 만들어 주고 있다.

  - 우안 최영식(화가)의 '산막골일기'(201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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