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시'라는 상징 혹은 독고다이 하이에나! / 손현숙(시인)

洪 海 里 2020. 1. 7. 14:15

'시'라는 상징 혹은 독고다이 하이에나!

  - 「시인의 편지」외 9편(월간《우리詩》2019. 12월호)


  손현숙(시인)

 


  오스만제국의 세밀 화가들은 일평생을 한 가지의 그림만을 그린다. 그들은 정해진 사물을 보고 또 보면서 손으로 세밀하게 저들을 묘사한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대상을 그림 그리다 보면 화가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반드시 눈이 멀게 되는데, 그들은 그때부터 진짜 그림을 시작한다고 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손이 기억하는 대상들은 너무나 치밀하고 세밀해서 아무도 화가의 눈멀었음을 짐작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부터 다시 죽는 날까지 진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결국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도 없이 안다는 것일 터. 


  홍해리 시인의 이번 신작 소시집의 시편들은 모두 사물의 본성이 시로 상징화되어 시와 시인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런 시인의 시를 읽어가면서 고개를 갸웃하게 했던 생각들은 시로써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시로 세상의 영광을 본 것도 아니었을 텐데 시인은 무슨 힘으로 하루를 평생처럼 변함없이 시를 쓰고 또 써왔던 것일까, 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필자는 오래도록 홍해리 시인을 만나 뵈면서 살았다. 그렇다고 자주 뵌 적은 없지만,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로 소원한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필자의 봄은 시인이 보여 주시는 청악매靑萼梅의 향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봄이 가고 또 오고 십 수 년이 지나가는 동안 시인의 허리는 단 한 번도 굽은 적이 없었다. 말씨도 문장도 태도 또한 변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세밀화가의 변함없는 정성처럼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이 쓰는 시의 한 편이자, 한 장면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시의 상징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누가 감히 그런 시인의 정신에 도전이나 거역을 할 수 있을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시를 탁마하는 시의 정신은 이태백이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겠다는 시를 향한 집념과도 상통한다.


  따라서 이번 신작 소시집의 커다란 맥은 결국 시로 상징화되는 세상의 말씀이다. 시인이 새벽에 일어나서 물 한 사발 들이켠 후 받아 적은 이 많은 시편들은 모두 몸의 길로 통하면서 시로 형상화된다. 아직은 캄캄한 새벽녘,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도래할 시간에 관하여 사색하는 동안 수많은 그림들이 그의 몸을 통과할 것이다. 시인은 눈앞에 펼쳐지는 무늬들을 해석하면서, 밤하늘의 별들을 온전히 받아 적는 것으로 시를 사는 거다. 그렇게 시화  시인의 시편들은 세상에 펼쳐진 무늬에 대한 해석, 시인이 몸으로 받아쓴 삶의 상징들이다.


  여기서 상징이란, 사물을 전달하는 매개적 작용을 통칭하는 말로,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기호가 그 성질을 직접 나타내는 것과 달리 상징은 그것을 매개로 다른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자,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부릴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자는 홍해리 시인이 발화하는 상징을 통해 시인이 가고자 하는 저 먼 곳의 세상을 조금 엿볼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번 신작 소시집의 시들을 모두 상징에 기대어서 읽어볼 것이다.


산만刪蔓하옵고,

일백오십 편의 시로 시집 한 권 엮었습니다

정가, 거금 15,000원정

편당 가격 일백 원

박리다매薄利多賣로 내놓아도

팔리기는커녕

파리만 날리고 있는

먹지 못하는 밥이 되어

먼지만 쌓이고 있습니다


-시인의 편지, 부분



  얼마 전의 일이다. 인터넷 시장에 반백 년이나 된 시 전문 잡지의 창간호가 일십만 원에 경매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반백 년 전에 창간된 잡지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일전에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싸다, 싶다가도 누군가의 밥이 되지 못하는 시의 가격이 그만하면 괜찮다는 자조의 시를 쓴 적도 있다. , 도대체 이 시대에 준하는 시의 가격은 누가 매김질하면서 누구의 가슴을 가격하는 것일까. 술도 삼십 년이 넘으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하는데. 위의 시에서 화자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독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시의 위의나 가치에 대하여 돌려 말하는 상징적 발화를 한다. 각설하고 직접화법으로 발화되는 시의 가격은 일백 원이다. 150편의 시를 한 권으로 묶어서 정가 15,000원에 내놓았으니 수리적인 계산으로는 분명히 시 한 편당 백 원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에 백 원짜리 시집은 내놓아도/ 팔리기는커녕/ 파리만 날리고 있는/ 먹지 못하는 밥이 되어화자, 즉 시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위의 시에서 발화하는 시, 즉 이 시대에 살면서 시를 쓰는 시인의 운명은 어쩌면 일백 원짜리도 못되는 시인임을 시인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의 시에서 기표화 되어 있는 일백 원’, ‘먼지’, ‘파리등등의 상징은 오늘날 시에 매료되어 시에 목숨을 거는 현역시인의 지난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보은 회인에서 칼을 가는

앞못보는 사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요

귀로 보지요

날이 서는 걸 손으로 보지요

그렇다

눈이 보고 귀로 듣는 게 전부가 아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지 않던 것

언제부턴가 슬몃 보이기 시작하고

못 듣던 것도 들린다

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

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것

굳이 시론詩論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빼어난 시안詩眼이다

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고 있다.


-정곡론正鵠論」, 전문



  시의 제목은 '정곡'이다. 사전적 의미로 정곡은 사물의 가장 중요한 핵심 또는 요점이다. 그렇다면 시에서는 분명 정곡을 찔러 말하고 싶은 무엇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화자는 시의 첫 행에서 앞을 못 보는 사내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그런데 그 사내의 직업이 위험하고도 위험한 칼을 가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가능한 일일까. 오스만제국의 세밀화가들처럼 여기에도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장인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현상적인 것만을 진실이라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밤은 어두워서 더 환하고 낮은 환해서 더 어둡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시의 정경이다. 화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칼갈이 사내의 일화 위에 슬몃 시인의 시 쓰기에 대한 태도를 얹어둔다. 어렵게 풀어가는 시론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어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언표한다. 앞을 못 보는 사내가 날이 서는 것을 느끼는 방법을 바로 시로 치환하면서 '보지 않고도'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게 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벼리고 벼려서야 겨우 오는 것임을 상징 발화한다.


 

고독한 하이에나 한 마리 

순식물성인 내 마음속에 살고 있다

미친 여자의 웃음소리를 내고

기분 나쁜 비웃음을 흘리는

포유류 식육목의 청소부 하이에나

밤새도록 세렌게티 평원을 홀로 헤매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다 깨곤 하는

외로운 하이에나


(중략)


아침 해가 새빨간 혀를 내밀 때

살코기인 줄 알고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석 달 열흘 굶은 하이에나 껄떡대는 소리

아작아작 씹어대는 저 단단한 이빨과 턱

새벽잠을 잊은 나의 귀여운 하이에나는

백지 평원을 겅중거리며 헤매고 있다

명상의 맛있는 살코기를 찾아서.


 -고독한 하이에나, 부분


 

  이번 홍해리 시인의 신작 소시집 해설의 제목이 , 라는 상징 혹은 독고다이 하이에나. 필자는 홍해리 시인을 상징하는 기표를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에서 독고다이, 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독고다이'는 일본말이지만, 우리에게는 의리나 정의 혹은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는 강하지만 고독한 이미지의 어떤 상징물로 각인되어 있다. 시의 장면은 잠에서 깬 신새벽에 화자로 간주되는 시인의 독백과도 같은 자전적 목소리로 전개된다. , 혹은 내로 발화하는 시의 화자는 자신을 순식물성인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떤 그림자를 고독한 하이에나 한 마리로 명명한다. 그 하이에나의 습성은 밤새도록 세렌게티 평원을 홀로 헤매기도 하고.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다 깨곤 하는 고독한 존재로 등극한다. 그 고독한 몸속의 하이에나는 무엇인가에 굶주려 하며 살코기인 줄 알고 물어뜯으려 달려드는하이에나이고. “아작아작 씹어대는 저 단단한 이빨과 턱을 갖고 있는 사나운 맹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화자는 그런 무섭고도 치열한 하이에나를 나의 귀여운 하이에나라고 굳이 불러 세운다. 말라르메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시 속의 화자는 이미 백지 위에서의 공포를 평생 간파하고 있는 시인일 터. 화자가 발화하는 하이에나의 행보는 백지 평원을 겅중거리며 헤매고 있다처럼 화자는 이미 미친 여자의 웃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기분 나쁜 비웃음을 흘리기도 하는 새벽의 광기에 매료되었던 거다. 누가 그랬더라, 예술가는 광기로 예술을 완성한다고. 시인의 직분을 '고독한 하이에나'로 알레고리화시키는 위의 시는 지독한 피의 냄새가 진동한다. 그것으로 시인은 본인의 서늘한 모습 위에 강한 시어들을 포개면서 시의 엄혹함을 선언적으로 드러낸다.


 

흙인 남자 물인 여자 서로를 다 녹이고 사뤄, 드디어

온몸이 클리토리스인 자기가 된다


눈빛만 닿아도 소리치고 손길 닿으면 자지러지는

너는 나의 비어 있는 호수


청자의 비색이나 백자의 순색으로 영원을 얻은

너는 나의 혼을 연주하는 바람의 악기


늘 네게 담겨 있어도 나는 가득 차지 못하는 하늘이어서

빈 마음으로 마른 입술을 네게 묻노니.


-자기 또는 , 전문


 

  '자기'는 도자기를 일컫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애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위의 시에서 상징 발화하는 자기는 동음이의어로써 두 가지의 의미를 함께 동원한다. 그러니까 자기, 즉 연인을 호명하는 뜻과 도자기를 뜻하는 자기는 가벼움과 묵직함을 함께 수반하는 음성발화 형태의 시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시에서는 흙과 불이 어우러지는 것을 묘사했다면 위의 시에서는 흙과 물이 자연스럽게 섞여진다. 현대예술의 역사는 예술이 일상이 되는 과정으로 발전했다, 라는 예술이론처럼 위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시를 일상처럼 살아가는 아슬아슬한 시인의 운명을 묘파한다. 시를 조금 뜯어서 읽어보기로 한다. 도대체 온몸이 클리토리스인 자기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일일까. 바로 위의 행에서 발화하는 서로를 다 녹이고 사뤄처럼 모두가 타서 사라지는 극지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면 눈빛만 닿아도 소리치고 손길 닿으면 자지러지는결과에 이를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득 차서 충만한 것이 아니라 결국 다시 비어지는 것으로 채워지는 너는 나의 비어 있는 호수로 묘사가 되는데, 그것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서만 노래하는 비색과 순색의 신비일 터. 이는 맨발로 평생을 찾아 헤맸던 시인의 시를 상징하는 간절한 발화체계가 아닐까. 특이하게도 위의 시는 스스로가 흙을 빚어서 만든 자기를 화자, 즉 시인으로 분했다가, 도로 타자로 치환시켰다가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는 주체의 탈주를 시도한 시이기도 하다. 마지막 행에서 물음으로 시를 마감하는 위의 시는 빈 마음으로 마른 입술을 네게 묻노니.”로 결국 시인이 지향하는 시의 하늘은 늘 네게 담겨 있어도 나는 가득 차지 못하는갈증이어서 하이에나, 시인은 고독한 하이에나로 어쩌겠는가, 시 말고는 삶의 해답을 찾지 못한 고독한 사내였음을.


  이상으로 이번 홍해리 시인의 신작 소시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를 상징발화의 방법으로 읽었다. 시인의 편지로 시작하여 자기 또는 시로 끝을 맺는 이번 소시집에는 시를 쓰는 시인의 고뇌가 책장처럼 빼곡하다. 시작노트에서도 드러나듯 시인은 좋은 칼은 사람을 찔러도/ 피가 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시의 엄혹한 책무를 선언한다. 또한 시인의 시선은 무량광대해서 우주를 한 채의 작은 암자로 언사한다. 시의 편편 마다마다 시에 관한 삶을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는 시를 향한 애절함과 그러나 다가서지 못하는 간절함이 피처럼 묻어 있다. 평생을 쓰고도 아직 닿지 못한 길, 그게 시, 혹은 예술의 숙명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잔혹한 무엇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멀어서 푸른 하늘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 이번 생이라면 어쩌랴, “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는 그 순간까지 가보는 수밖에는. 홍해리 시인의 건강과 건필과 건안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