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석양도 누워서 진다 / 이재부(시인) / 산책(홍해리)

洪 海 里 2020. 1. 11. 19:08

 

석양도 누워서 진다

 

이 재 부(시인)

 

 

 

   시인은 심정(心情)에서, 심정(心井)에서, 심정(心正)으로 청수를 길어 올리는 사람인가보다. 시인과 동행을 했더니 정성의 신선함이 깊은 샘에서 옥수를 퍼마신 기분이다. 일평생 살면서 마음은 행동이 솟아나는 샘이지 않는가. 마음의 샘에서 맑은 물만 솟으면 얼마나 좋을까. 청수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여 마시지만 탁한 물은 허드레 물로만 쓰지 않던가. 시인이 길어 올린 시정(詩情)의 탁도(濁度)는 시인 심정의 투명도이리라. 그래서 옛 성현도 명시를 추려 뽑아 시경(詩經)을 만들고 문학을 초월한 유가(儒家)의 경전으로 활용하지 않았던가.

   정치인은 물길을 조정하여 댐을 만드는 사람에 비유하면 어떨까. 위치를 잘 못 잡거나, 부실공사를 하여 물이 고이지 않던지, 줄줄 새면 임기를 채우기도 힘들고 퇴임 후에도 지탄만 돌아오지 않는가. 만백성이 사용하는 맑은 물이 수자원이 듯, 생각이 모이고 인물이 모이는 정치 댐의 투명도도 정치인 양심의 탁도(濁度)를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명시(名詩)를 감상하듯 정치인의 무대였던 대통령 별장, 청남대를 돌아본다. 물과 산이 조화를 이룬 천연 요새가 분명한데 왜, 쓸쓸함이 감도는지. 오후 늦은 시간이라 그러한가보다. 참으로 조용하다. 석양이 기우는 아름다운 수변 숲속에 산책길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길 이름을 대통령 존함을 따다 붙인 것이 이채롭다. 그중 「노태우대통령길」을 택해서 걸었다.

   구절양장의 산길을 잘 정돈해 놓아 산책을 즐기는 길 풍경이 자연경의 원문이다. 홍해리 시인님의 시「산책」을 연상시킨다. 산책길 초입부터 돈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산- 책을 밟아 읽는 독서의 기분이다. 발길의 감촉에 오감이 젖어들어 자연경(自然經)의 내면이 저절로 해석된다. 호수와 연해있는 풍광이 마음을 움직이는 살아있는 책 속에 정치도 시도 들어있다.

  많은 생각을 하며 발을 옮겨 책장을 넘긴다. “홍”시인의 작시(作詩) 무대가 여기는 아닐 텐데 살아있는 책이 여기를 두고 한 말 같다. 자연경(自然經)을 함께 읽고 논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가을빛 짙은 계절의 선물을 주워 담으며 풍광을 읽어낸다. 주머니도 마음도 불룩해졌다.

 

   금강의 물길이 금강에 머물면서도 문패를 바꾸어 달았다. 청남대 대지를 휘어감은 대청댐 물은 유동(流動)의 기상을 까맣게 잊고 얌전한 호수로 정중동의 미모만 자랑한다. 잔잔한 수면이 방문객의 심보를 비추는 거울 같아서 감추고 살아온 내 욕심이 비칠까 부끄럽다. 수면경(水面鏡)에 저장 능력이 있다면 휴가를 즐겼던 대통령님들의 흑백의 욕망이 볼만 했을 텐데 그렇지는 않은가보다. 크게 사는 임들의 공적과 원성이 메아리로 남아있는 곳이 분명할 텐데…….

   역사의 현장이었던 수륙의 명당인 이곳 정기가 벌써 소진했는가. 주인을 잃은 청남대는 화려한 겉옷만 입고, 속옷은 버렸나보다. 국정을 구상하던 대통령이 찾지 않는 대통령 별장은 아무리 꾸며 놓아도 허전한 빈집이 분명하다. 한 번 보고가면 누가 다시 찾겠는가. 용도 변경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실수이리라.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청남대가 되었다.

 

   바람이 잠든 호수에 석양이 젖어서 사라진다. 젖어도 침묵하는 사연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지의 역사는 가슴으로 말하리. 긴 그림자 석양도 누워서 잠들듯, 무상의 권력도 다 그러한가보다.

   청정 수면과 솔숲에서 옷을 벗는 석양이 산 능선에 눕는다. 어둠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려는가. 마지막 빛 여운을 수면에 남기면서 하루의 자서전을 쓰려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이 대통령일까. 옛 권력의 영화와 고민이 그늘져 있는 청남대에도 하루를 막음하는 석양이 눕는다. 임들도 태양이듯 이곳에 편히 누워서 쉬었을까. 욕심의 강물을 막아 마음의 댐을 만들고 새고 넘치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나 다 인생이 풍년 가을처럼 풍요롭고 고우면 얼마나 좋을까. 시끄러운 세상은 누가 잠재우실는지…….

                                                                             (2013년 10월 2일 청남대에서)

 

〇참고: 「산책」 | 洪 海 里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홍해리 시집독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