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월간《우리詩》신작 소시집(2020. 11월호) / 洪海里

洪 海 里 2020. 10. 4. 19:56

월간《우리詩》신작 소시집(2020. 11월호) / 洪海里

 

〈시작 노트〉

 

   팔십 년을 달려 도착한 곳이 지금 여기 산수傘壽 마을! 이제는 뛰지도 말고 빠르게 걷지도 말자. 세월이 빠를수록 천천히 가자. 느릿느릿 느리게 살자. 좀 게으르면 어떤가 하는 생각으로 개으름쟁이가 되고 싶다. 그렇게 살면서 시도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미답 미지의 해리海里 마을에 가고 싶다.

   자꾸 뒤를 돌아다보면서 사는 요즘 내 시도 나를 그렇게 이끌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빨리, 빨리!’ 하면서 바보같이 살아온 게 내 삶이었다. 시를 쓰고 발표하는 것도, 시집을 내는 일도 그렇지 않았던가!

   이제는 배꼽털달팽이처럼 살면서 반딧불이 같은 시를 쓰자. 발광세포를 가진 개똥벌레는 어두워져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내게도 발광기를 하나 달아야겠다. 그 빛으로 느럭느럭 세상을 비추면서 느리광이나 늘보, 바로 느림보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요즘 내 정신을 잡아 흔들고 있는 시편을 세상에 내보낸다. - 隱山.

 

 

 

한 톨의 쌀 외 9편

 

洪 海 里

 

 

 

쌀 한 톨이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을 빌렸을까

밥 한 그릇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네

쌀[米]이란 말 속에 들어 있는

여든여덟이란 숫자

그게 어찌 별것 아니겠는가

아버지 할아버지의 눈물과 땀

논두렁에서 막걸리 한잔에 날리던

한숨은 바람으로 날아가고

모 심을 때 들리던 뻐꾸기 소리 맞춰

못줄을 넘기곤 했지

벼 벨 때면 메뚜기도 다 자랐었지.

 

한평생 씹어삼킨 쌀알이 몇이랴

몇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그리고 또 얼마일 것인가

새벽녘 해장국집에서

한낮 백반집에서

파장머리 국밥집에서 먹은 밥 밥 밥

이제 땅은 눈보라 북풍 한설 속에

긴 잠을 자고 다시 농사를 시작하리라

밥심은 벼꽃이 이룬 쌀의 힘이다.

 

 

 

가을 한 점

 

 

 

따끈따끈하고 바삭바삭한 햇볕이 나락에 코를 꿰어 있어도 투명하다

 

혼인 비행을 하고 있는 고추잠자리가 푸른 하늘을 업고 빙빙 돌고 있다

 

여름 내내 새끼들로 시끄럽던 새집들은 이미 헌집이 되어 텅텅 비었다

 

너른 들판이 열매들로 가슴이 탱탱하니 더 바랄 것 하나 없이 가득하다.

 

 

 

우이동 우거

 

 

 

예가 제 집인 줄 알고 귀뚜라민 밤낮이 없고

 

그제는 고추잠자리가 날아오더니

 

어제는 베짱이가 오고

 

오늘은 버마재비가 한잔하자고 찾아왔다.

 

 

 

파자破字놀이

 

 

어느 해 가을날이었것다

시인 셋이서 우이동 '물맑'에 모여 장어를 굽는디

술 몇 잔에 불콰해진 산천에 취해

파자놀이를 하는디 이렇게 노는 것이었다

 

장어 '만鰻'자를 놓고 노는디,

 

한 시인은 "이 고기[魚]는 하루[日]에 네[四] 번을 먹고

또[又] 먹어 힘이 좋기 그만이라!" 하고,

 

마주앉은 시인은 "이 물고기는 맛이 좋아

하루에 네 번을 먹어도 또 먹고 싶으니라!" 하니,

 

그 옆에 앉은 시인은 "이 고기를 먹으면

하루에 네 번을 하고도 또 하고 싶다더라!" 하며,

 

먹고 마시고, 먹고 마시면서 노는디,

 

장어의 힘이 그만이라고 자랑하고,

그 맛을 추켜세우기도 하고,

또 그 효능이 최고라고들 떠들어 대는구나,

 

가만히 보니 고기는 어두일미魚頭一味라는데

누가 떼어 먹었는지 머리는 보이지 않고

보잘것없는 꼬리만 눈에 띈다

 

이때여 주인장이 나서면서,

 

'장어는 꼬리가 그 힘이 절륜하다'며 하나씩 건네는디

특미라는 꼬리를 보고 꼬리 사릴 일 있것는가!

 

"이제 비얌인지 비아그란지 모를 장어 꼬리까지 먹었으니

오늘은 날이 새고 밤이 새것구나, 얼씨구, 지화자!"

하며 노랫가락을 한 자락씩 뽑아내니,

 

맑은 물소리로 흘러가던 우이천이 한마디 거드는디,

 

'이 물고기는 물인 내가 키우니 주인은 나니라' 하는 소리에

백운 인수 만경의 삼각산이 발을 담그고 있다 껄껄 웃으며

'우이천의 어미는 바로 나로다' 하니,

세 시인은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며 귀를 터는구나!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

"아무렴 그렇지, 좋구나 좋다!"

 

 

 

단맛

 

 

 

세상에 가장 단 것은 죄의 맛이다

 

죄짓는 재미

얼마나 달면

 

날이 날마다

신문 방송마다 그리 요란을 떨까

 

모자 눌러 쓰고 고개 푹 숙인

뻔뻔한 얼굴들이 줄을 잇는다

 

'죄지은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는데

 

왜 죄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가?

 

 

 

우이동천牛耳洞天

 

 

 

어서 일어나라고

이른 새벽 꾀꼬리 울고

조금 있다

아침 준비에 바쁜

까막딱따구리

따악 딱 따르르르르

도마를 두들겨 댄다

그 소리 따라

검은등뻐꾸기

인생 정말 별것 없다

그래 맞아 네 말 맞아

네 박자로 울고 있네

한평생 그게 그거

네 멋대로 살다 가라

눈치 볼 것 하나 없다

네 뜻대로 살다 가라

네 박자 내 박자

우이동천 우리 동천.

 

 

 

그리움

 


눈썹 끝
네 그림자
꿈에 어리어,

잠 깨어
잡으려니
날이 밝았네.

 

 

 

탓하는 세상

 

 

 

어찌 탓이란 탓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만 있는 것인가

 

"내 탓이오, 내 탓!"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말은

어디로 사라지고

 

"네 탓이야, 네 탓!"

'이것도 네 탓, 저것도 네 탓,

그것도 네 탓!' 하는 소리만

빈 깡통, 빈 수레처럼 요란한 것인가

 

그릇된 원인도 잘못된 까닭도 다 내 탓

원망과 핑계가 모두 네 탓이 아닌

내 탓이구나

그렇구나 세상은 다 내 탓이로구나.

 

 

 

막걸리밥

 

 

아기가 엄마 젖을 빨아 대듯이

 

막걸리를 마시는 나를 보고서

 

"선생님은 아기세요,

막걸리젖을 먹는!"

 

그 말 한마디에 막걸리는 밥이 된다.

 

 

 

착각

 

 

 

나이 팔십이면

뭔가 보일 줄 알았다

 

나보다 더 사신 분께

뭐가 보이느냐 물었더니

눈이 점점 침침해지는데

무엇이 보이겠는가 하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은

나이 먹은 눈이 아니라

눈빛 맑은 어린 눈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눈이다

 

무지개가 피어도

나는 보지 못하는데

아이에게는 날마다 무지개가 뜬다.

 

 

 

내 시인의 일생

 

 

 

왜 쓰는가

어떻게 쓸 것인가 하다

 

글을 쓰는 일이

쓸데없는 것을 끼적대는 것임을

 

한평생이 다 지날 즈음에서야

겨우 깨닫는 게 시인이구나

 

시 한 편 쓰지 못했다

이게 내 시인의 한생전이었다

 

입때껏

마냥 잘 놀았다, 詩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