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시집 『치매행致梅行』
2021. 12. 31.
예전부터 사보려고 별렀던 홍해리 시인의 <치매행>을 이번에 주문해 읽었다. 아내의 치매를 돌보면서 쓴 시가 거의 150편이나 들어 있다.
치매는 뇌의 노화로 생기는 병이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하는 몹쓸병으로 누구나 두려워하고 가족까지 힘들게 하는 가정파괴범이라고 생각들을 한다.
나도 40대를 시부모님 두 분의 치매로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지만 돌아가시고 나서 깨달은 것이 우리들에게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치매를 고통으로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시부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돌볼 좋은 기회였었는데, 너무 인간적이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으로 그분들을 짐스러워만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돌보는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만 있으면 치매는 노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다. 신체적으로 고통을 잊고 심리적으로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져서 똥 싸고 오줌 싸는 아기 상태가 되어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과정인 것이다.
홍해리 시인은 영이 발달한 시인이라서 그런지 그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치매에 걸린 아내를 사랑으로 돌보며 그 마음을 시로 쓰시는 분이다. 그래서 서문에서 치매를 매화에 이르는 길, 도에 이르는 길이라 표현하셨다.
그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쌀 씻어 안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먹고 씻부시고 하면서 문닫고 들어앉아 아내랑 말없이 바라보며 노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동시에 자기가 아무리 사랑으로 아내를 돌보아도 아내는 홀로 외로운 길을 가고 있음도 알고 있다. ‘꿈길에 서서’라는 제목의 이 시를 읽으며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걸어서 갈 수 없어 아름다운 길
눈부터 취해 가슴까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도 갈 수 없는 길
안개 속으로 구름속으로 헤매고 있었습니다
가슴으로도 못 가는 길
가까워도 멀기만 해 어둠 속 둥둥 떠 있었습니다
내 생의 이물과 고물 사이 가지 못할 길 위로
그리움은 다리를 절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가는 길은 가지 말아야 할 길
그 길을 아내가 홀로 가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과 희망이 한집에서 살고 슬픔과 기쁨이 같은 이름이고 삶과 죽음이 한길이요, 미움과 사랑이 본시 한 몸임을 알고 있다. 모두가 짝이 있는데 아내는 고장난명의 외손뼉을 치며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 것이다. 치매의 외로운 상태를 어찌 그리도 잘 표현했을까?
'빵과 아이스크림'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며 가슴이 뜨끔했다. 어느날 우연히 냉동실을 열었더니 아이스크림으로 가득차 있더란다. 냉장실에는 빵을 잔뜩 사다 놓고 매일 아내가 몇 개씩 먹어서 체중이 부쩍부쩍 늘더란다. 그러더니 1년 사이에 물건을 사는 일도 먹는 일도 하나도 못하니 다시 체중이 바싹 줄어 바람에 날아 갈 것 같단다.
치매 시작이 바로 아이스크림으로부터 비롯된 건 아닌가 싶어 한겨울에도 아이스크림을 사다 쟁여놓고 먹고 싶어하는 내가 치매 초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내의 말’이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치매의 정신상태가 너무 깨끗하고 맑아 부럽기조차 했다.
제 무게에 겨워
스스로 몸을 놓고
한없는 가벼움으로
세월을 날리며
돌아가고 있는
한 생의 파편
적막 속으로 지고 있다고
가벼이
다 버리고
다 비우고도
한평생이 얼마나 무거웠던가
이제 우주가 고요하다고
별들이 초롱초롱 내려다 본다고
눈썹 위에 바람 잔다고
당신에게 소식 한 잎 띄웁니다.
‘아내는 부자’라는 시는 더더욱 내가 왜 치매를 하느님 주시는 축복이라 했는지 여실하게 드러나는 시다.
나는 평생 비운다면서도
비우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
버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내려놓자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버린다 비운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내려놓는다는 말도 없이
아내는 다 버리고 비웠습니다.
다 내려놓고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
천하태평입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걱정이 없습니다.
집 걱정 자식 걱정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는 아내는
천하 제일의 부자입니다.
임채우 시인은 발문에서 아픔이란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정념덩어리라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때 풀어진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으로 그걸 움켜잡고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병을 자라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아내는 평생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2남1녀를 잘 키워내신 어머니고, 까다롭고 술을 좋아하는 시인을 평생 뒷바라지해 옴으로써 남편에게는 뚜껑 역할과 옷의 역할을 다 한 양파같은 여인이다. 소띠 아내였다니 새해라야 74살밖에 안된 분인데 너무 일찍 치매라는 병에 걸린 것 같다. 발문을 쓴 임채우 시인도 오랜 투병 끝에 상처한 아내를 가슴에 안고 살기에 그의 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홍해리 시인을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에 비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 산티아고 노인과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상어에게 고기를 다 뜯겨도 다시 허무의 바다로 노저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마지막에 있는 ‘물’이라는 시로 사랑의 정체를 제대로 표현한 시 같다.
그대가 그리우면
그대 곁에 가까이 갑니다.
그래도 그대가 그리우며
그대 손을 가만히 잡아봅니다.
그래도 또 그대가 그리우면
그대 몸에 살며시 손을 댑니다.
그대의 몸에 몸을 대고 있으면
나는 그대로 물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그대 속으로 서서히 스며듭니다.
그러면 나는
그대와 하나가 됩니다.
그대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그대를 향해 가는 길이 납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마다
빛이 쌓이고 쌓여 꽃이 피어납니다.
그 꽃이 피워내는 향이
천상까지 가득 차오릅니다.
그러나 환상으로 본 관념 속 세상은 사랑의 마음으로 보면 그리 천상의 향기 가득한 천국이지만 현실로 돌아와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감옥이 되고 지옥이 된다. '감옥'이란 제목의 시에서 그는 춥고 어두운 감옥, 괴롭고 답답한 감옥을 그리고 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세상이 감옥이고, 속마음 한번 내뱉지 못하는 세상이 지옥이라 표현한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의 서로 다른 이름이 아닐까? 사랑으로 살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이 살면 지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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