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월간《우리詩》신작소시집 /2023. 1월호.

洪 海 里 2022. 11. 15. 08:38

* 흰꼬리수리 : 홍철희 작가 촬영.

 

 2023. 신년호 〈신작소시집〉 

 

세란헌洗蘭軒 외 4편

 

洪 海 里

 

 

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난잎을 씻고

내 마음을 닦노니,

 

한 잎 한 잎 곧추서고

휘어져 내려 허공을 잡네.

 

바람이 오지 않아도

춤을 짓고,

 

푸른 독경으로 가득 차는

하루 또 하루

무등, 무등 좋은 날!

 

* 세란헌 : 우이동에 사는 한 시인의 달팽이만 한 집.

 

푸른 하늘 무지개

 

 

늙바탕에 한무릎공부했다고

깔축없을 것이 어찌 없겠는가

세상 거충대충 살아도

파근하고 대근하기 마련 아닌가

 

나라진다 오련해진다고

징거매지 말거라

한평생 살다 보면

차탈피탈 톺아보게 되느니

 

더운 낮에 불 때고

추운 밤에 불 빼는

어리석은 짓거리 하지 마라

 

씨앗은 떨어져야 썩고

썩어야 사는 법

때 되면 싹 트고 열매 맺느니.

 

독거놀이

 

 

오늘도 혼자 앉아

물밥 한 병, 닭가슴살 안주 해서

한 끼를 때우는데

 

겨우내 바삭바삭 가물다

모처럼 내리는 비에

귀 열고 속 아닌 속까지 적시니

 

마당가 청매 가지마다

꽃봉오리 뽀얗게 부풀고

나무 아래 부추와 돌나물도 숨이 가쁜데

 

대문을 열어 놓았나

현관문은 열려 있나

내다보아도 오는 사람 없고

빗소리만 귀를 씻어 주노니

 

유언을 하듯

유서를 쓰듯

내가 나를 벗어나는 해탈이요

내가 나를 버리려는 열반이네.

 

죽음竹音

 

 

죽음이란 말이 왜 그리 무거운가

죽음은 대나무가 내는 소리가 아닌가

한 칸 한 칸 쌓아 올린 빈 탑마다

세상의 소리를 다 모았으니

그 얼마나 황홀한 궁전인가

날마다 펼치는 궁정음악회

우주의 소리란 소리

청아하고 애절한 소리를 다 모아

들려 주는 합창이니

죽음이란 얼마나 눈물겨운 공양이요 공연인가

백조가 마지막으로 들려 주는 울음이 아닌가

우리도 기왕에 한 말씀 남기려면

대나무 우는 소리가 어떨지

땅 속으로는커녕 대처럼 옆으로 뻗지도 못하고

무한 천공으로 치솟아 보지도 못 했으니

언제 세상 소리 다 모아

땅과 하늘을 이어 볼 수 있겠는가

[]는 죽은 후에도 모든 소릴 뽑아내니

우리가 죽는다는 것도

죽은 대나무 소리를 따를 일이 아닐런가

마당가 몇 그루 오죽烏竹

한겨울에 얼어죽었다

봄이면 되살아나는 걸 보며

죽음학을 해마다 펼치게 되네.

 

자연법

 

 

몸 소리치는 대로 마음 대답하고

마음 부르는 대로 몸 응대하니

 

춤추고 노래하라

기뻐하고 슬퍼하라

 

마음 가는 대로 몸 따라가고

몸 이끄는 대로 마음 뒤따르니

 

나무를 보라 새를 보라

구름 없는 청산 얼마나 외로운가

 

마음 떠난 몸 어디로 가나

몸 잃은 마음 어디서 떠도나

 

몸과 마음, 마음과 몸

응달진 마음자리 쏟아지는 가을볕 아닌가.

 

* * * * * * * * * * * * * * * *

 

 

<해설 및 감상>

 

 자연법의 언어

 

                                                  임채우(시인·문학평론가)

 

 

  1

  한 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면 그  대략적인 실체가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쓴 적이 있다. 여기서 누가는 시적 화자를 말하며, 무엇은 시의 내용적 측면이고, 어떻게는 시의 형식이나 표현 기교 등을 말한다. 이 간단한 시 감상 매뉴얼을 대입하면 대강의 이해에는 도달할 수 있으나 두루 갖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한 편의 시를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질문의 가짓수가 필요하며, 그것에 최선의 답을 마련해야만 한다. 그만큼 현대시는 복잡하고, 모호하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홍해리 시의 시적 화자는 시인 자신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결코 ‘화자=시인=나’의 등식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 속의 〈나〉는 자연인으로서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 안에 존재하는 독특한 〈나〉이다. 그의 시는 독자가 엿듣는 듯한 작자 〈나〉의 내밀한 독백이며, 소수의 상대에게 몰래 들려주는 고백이다.

  홍해리 시를 대하며 새삼 화자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그의 일관된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다는 자각이다. 그의 시는 시인 자신으로 볼 수 있는 시적 화자가 항상 같은 목소리로 말하거나(꾸짖거나 울분을 토하거나) 들려주고(독백이나 고백) 있다. 그는 보여주는 말하기 방식은 즐겨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직설적이다. 우리는 이 같은 화자의 말하기 방식이나 목소리에 대해서 그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간과했었다.

  시에서 화자가 청자나 제재에 대하여 취하는 특정 태도를 ‘어조語調라 한다. 어조는 화자와 관련해서 작품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개성적인 특질로 목소리(voice)라고도 한다. 그러나 권혁웅은 그의 『시론』에서 어조는 화자의 감정만을 드러내는 시인의 주관적인 태도가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객관적인 지표라고 말한다. 곧 내가 어떤 태도로 세상을 보는가보다는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나와 연계되어 있는가가 어조를 낳는다고 하였다. 그는 대상과 관계에 따라 어조를 1) 풍자, 2) 예찬, 3) 연민, 4) 반성, 5) 해학으로 분석하였다. 이 밖에도 고백, 독백, 관조, 냉소, 영탄, 청원, 명령 등의 어조를 거론하였다. 여기서는 어조 분석이 주가 아니기에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을 피하기로 한다. 홍해리 시인의 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목소리는 바로 자기 내면의 소리이며, 그는 말하거나 들려주는 방식의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며, 시적 상황이나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어조의 변화를 보인다.

  그의 「치매행致梅行」 연작시에 나타난 목소리는, 인생 말년의 시련기에 자신에게 향하는 울분, 격정, 비탄의 어조가 주조를 이루었다. 이를 비유하자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리어왕』의 주인공 목소리와 비슷하다. 자신의 왕국을 간사한 두 딸에게  빼앗기고, 급기야 폭풍이 몰아치는 밖으로 내침을 당하여, 분노와 고통으로 광인이 되어버린 리어가, 자신의 그릇된 안목과(효성스러운 셋째 딸을 무일푼으로 프랑스 왕과 지참금도 없이 내쫓았다),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딸들을 저주하며 죽음에 달하는 울분을 토하던 리어왕의 목소리가 허허벌판에 몰아쳤다. 잃어버린 왕국을 꿈꾸며, 뒤바뀐 운명에 맞서며 질타하는 목소리가 「치매행致梅行」 연작시의 목소리와 비슷하다.  

  이번 〈신작소시집〉의 시 다섯 편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인 자신임에는 동일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다르다. 「치매행致梅行」 연작시의 목소리가 운명과 맞서는 사자후라면, 이번 〈신작소시집〉은 격랑이 지난 후 쓸쓸하고 외롭고, 그러면서도 바닥에는 여전히 안달과 노심초사가 깔린 목소리다. 이 목소리는 예언자 에레미아의 목소리와 흡사하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레미아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른다. 그는 기원전 626년에 하늘의 소명을 받고 40여 년을 활동한 유대의 예언자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바벨론에 의해 유대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수많은 사람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시기였다. 그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입술로서 ‘회개’와 ‘회복’과 ‘메시아의 구원’을 선포하면서 동족과 함께 고통과 탄식의 한 생애를 살다 간 사람이다.

  리어왕의 목소리가 빼앗긴 왕국에 대한 울분과 분노라면, 에레미아의 목소리는 무너진 성전과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신의 목소리에 대한 비탄과 애상이다. 이 시인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의 삶을 초월하여 리어나 에레미아처럼 자신의 왕국이나 신의 처소인 성전에 가 닿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어도, 에레미아도, 그 누구도 인간이 욕망하는 초월의 경지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고독한 단독자로서 때론 분노하고 때론 비통해 하는 목소리만이 빈들에 외롭게 울려 퍼졌다.

 

  2

  홍해리 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시 감상 매뉴얼 둘째와 셋째의 순서를 바꾸어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자기 생각과 느낌을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거나 들려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 때문에 대부분 그의 시는 특별한 표현 기교 없이 직설적으로 자기 내면을 드러낸다.

  시인의 직설적인 언어에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그는 시어를 가지고 논다, 그는 시어의 운용에 매우 능통한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시에 동음이의어, 유의어, 유사 발음, 첩어 사용, 이음동의어, 뒷말 잇기, 문장의 주체와 객체의 자리바꿈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시어를 굴리는 것이 마치 공기놀이 하듯이 언어유희(pun)를 즐기거나, 그것으로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 수법이 거의 본능적이다. 이런 기교가 능숙한 그의 시를 읽노라면,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이 절로 떠오른다. ‘놀이하는 인간’, ‘노는 인간’이라는 인간의 유희적 본능을 문화나 예술적 차원으로 승격시켰다. 홍해리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논다. 언젠가 그는 말하였다. "시란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시란 별것 아니에요. 시시한 게 시입니다."  

 

늙바탕에 한무릎공부했다고

깔축없을 것이 어찌 없겠는가

세상 거충대충 살아도

파근하고 대근하기 마련 아닌가

 

나라진다 오련해진다고

징거매지 말거라

한평생 살다 보면

차탈피탈 톺아보게 되느니

 

              ―「푸른 하늘 무지개」 부분

 

  4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내용상 전반부 1, 2(인용 부분)과 후반부 3, 4연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는 제목이 사실에 부합하지 못하는 듯하다. 푸른 하늘에 무지개라니, 무지개는 비가 오고 난 뒤 뜨기 마련인데(비가 오고 난 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을 말함인가) 이 둘의 조합이 아리송하다. 그런데 전반부 언어들이 심상치 않다. 미처 의미를 새기기도 전에 턱턱 걸리며 미끄러져 간다. ‘한무릎공부하다’는 그런대로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이어 등장하는 ‘깔축없다’, ‘거충대충’, ‘파근하다’, ‘대근하다’, ‘나라진다’, ‘오련하다’, ‘징거매다’, ‘차탈피탈’, ‘톺아보다’가 목에 걸린다. 이 말들은 우리 고유어이거나 국어사전에 고이 누워 있는, 입말〔口語〕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들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시인처럼 어휘력이 뛰어나 위의 말들의 정확한 어의를 파악하고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홍해리 시인은 시를 쓰거나 교정 작업을 할 때 수십 년 손때가 묻은, 거의 닿고 닳은 구판 동아출판사 국어사전을 항상 끼고 산다. 누군가 일본어 찌꺼기를 운운했다든가, 혹 버스 안의 광고판에 맞춤법에 어긋난 표현이라도 눈에 띄는 날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런 시인이 아름다운 우리말이나 잠자고 있는 말을 깨워 그의 시에 근위병으로 세웠다 하여 이상할 것도 없지만, 너무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통상 시 한 편에 또는 한 연에 의미가 모호한 낱말 하나만 있어도 흐름이 끊기기 마련인데 이는 숫제 지뢰밭처럼 생경한 시어가 집중적으로 매설되어 있으니. 험난한 고개를 넘어 후반부에 들어서면 이와 대조되게 시어의 운용이 너무나 평탄하여 활강하듯이 미끄러지는 것이 결코 우연일까? 시인은 왜 이런 기표만을 수면 위로 내보이고 기의가 잠복하여 감감한 요령부득한 시어를 일부러 사전에서 골라 쓴 것일까?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주창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프로이트의 저작을 깊이 읽으며 스승을 이어받는 듯했지만, 그를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해석과 연구로 명성을 얻어 새로운 이론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논문집 『Ecrits』를 보면, 스위스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와의 언어학적 영향 관계를 볼 수 있다. 소쉬르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었다. 기표와 기의 결합은 자의적이지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소쉬르는 기의가 있기 때문에 기표가 있다고 말하면서 기의가 기표에 우선한다고 하였다. 라캉도 기의와 기표의 결합이 자의적이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이 둘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장벽이 있어 기표가 기의에 닿지 않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기표가 있기에 기의가 있다고 말하며, 기표가 기의에 우선한다고 하였다.

  기표가 기의에 가 닿지 않고 미끄러진다는 라캉의 말이 이 시의 행간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입말이 아닌 사전 속의  기표는 둘 사이의 가로막힘으로 결코 기의에 닿지 못한다. 기의는 감감한 바닥에서 요동치지 않는다. 의미 없는 기표의 표면에 잠시 머문 의식은 다음 기표로 미끄러질 뿐이다. 이것도 시인이 의도한 언어유희일까? 이것은 시인이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독자들의 의식에 일침을 가하려는 의도일까, 아니면 일종의 낯설게 하기일까? 시를 읽는 이는 부지런히 사전깨나 뒤적거리며 의미 파악에 나서겠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1연의 ‘거충대충’과 2연의 ‘차탈피탈’이란 부사가 그나마 쉬어가면서 숨통을 열어주는 곳으로 보인다.

  이것이 시인의 유희본능이다. 왜 우리의 축제도 아닌 외래의 핼러윈데이에 이태원에 가서 참사를 당했느냐고 아까운 생명들에게 묻지를 마라. 그냥 놀러 간 것이다. 무목적의 목적성, 인간의 놀이 본능이다. 놀이만큼 인간에게 살맛나게 하는 것이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예부터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 하여 나라에서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독거노인의 스산한 삶마저 놀이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물론 진한 역설적 표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작업이라도 놀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훨씬 그 심각성이 덜어지며 몰입할 수 있다.

  또한 시 「죽음竹音」에서는 동음이의어에 착안하여 언어의 유희적(fun)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과연 인간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러나 시인이 그것을 대나무 울음〔竹音〕으로 바꿔치기하는 순간 그것은 ‘황홀한 궁전’으로, ‘눈물겨운 공양과 공연’으로 화한다. 실로 fun fun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대지의 하향적 이미지가 공기와 같은 상승적 이미지로 화하면서 존재가 한결 가벼워진다. 이것이 기표 차원의 그의 유희적 본능이며, 그를 일컬어 언어의 마술사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3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시인이 에레미아의 목소리로 직설적으로 말하기와 들려주기를 통해서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이 부분은 시의 테마 분석이다.

  시인은 자연법을 말하고 있다. 자연이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라면, 자연법은 질서정연한 자연의 이치이다. 물론 자연 속에는 인식 주체인 인간까지 포함한다. 자연과 자연법, 시인은 결코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자연이 소위 생태주의 학자나 시인들이 부르짖는 더불어 지켜내야 하고 하나 됨을 이상으로 여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자연에 담겨 있는 삶의 이치나 지혜이다. 그는 자연법에 의해 인도되는 삶을 노래하고 있다.

  시 「세란헌洗蘭軒」 에서는 자연법에 의해 가지런히 정돈된 삶에 더없는 만족감이 드러난다. 자연법에 의해 영위되는 삶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같은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면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며, 자신의 거처는 바로 경건한 수도처로 변하여 “무등, 무등 좋은 날!(그 이상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최상의 날)이 된다는 것이다. 시인의 언어적 표현 이면에는 역설의 그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시 「푸른 하늘 무지개」를 보자. 여기서 시인은 구체적인 자연법의 일단을 피력하고 있다. “더운 낮에 불 때고/ 추운 밤에 불 빼는 어리석은 짓거리 하지 마라”(삶이란 상황에 맞게 적절해야 한다), “씨앗이 떨어져야 썩고/ 썩어야 사는 법/ 때 되면 싹 트고 열매 맺느니.(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말씀과 유사). 우리가 고단한 삶을 ‘거충대충’ 살거나 ‘차탈피탈’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자연법을 따를 때, 인간의 삶은 구질구질함에서 벗어나 ‘푸른 하늘 무지개’(청명하며 희망적이다, 일체의 부정적인 것이 걷힌 세상)로 화한다는 것이다.

  시 「독거놀이」에서는 자연법에 의해서 인도되는 삶의 경지를 보여준다. ‘내가 나를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열반’이라는 것이다. 불가佛家의 만법이 이 두 구절에 귀속되는데, 인간이 한생을 사는데 외롭고, 힘들고, 역경에 빠지는 것은 결국 나라는 의식 때문이다. 이 힘들고 문제시되는 나를 벗어버리거나 버려버리면 아무리 힘든 독거의 삶도 놀이로 화한다고 말한다.

  시 「자연법」에서는 자연법에 따르는 삶의 호젓함과 기쁨, 행복감 등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몸과 마음이 갈등 없이 온전히 하나가 될 때, 나무와 새, 청산이 홀로 자족 상태로 머물러 있듯이, 우리의 삶도 ‘응달진 마음자리 쏟아지는 가을볕’(가을볕처럼 따뜻하고, 행복하고, 갈등이 없는 화목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이 〈신작소시집〉에 발표된 시 다섯 편이 「치매행致梅行」 연작시 이후 홍해리 시세계의 변모인가는 아직 속단하기 이르다. 다만 이 〈신작소시집〉을 통해 시인의 마음자리와 목소리가 자리 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세상은 오늘도 유위有爲가 판을 치고 인간은 도처에서 난장판 같은 온갖 혼란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는데, 어떻게 살다 가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가, 시인은 자연법을 말하고 있다. 자연법은 지상의 의미 있는 종교들이 간파했던 인간이 살아가야 할 최상의 지침이며 지혜이다. 시인이 두루 한세상 풍파를 헤치고 마침내 도달한 항구가 바로 자연법이라는 보편의 세계인 듯하다. 이는 날카롭게 각진 돌들이 세파에 구르고 구르며 아픔으로 마모되어 마침내 원만한 몽돌이 되듯이, 우리의 삶과 시 또한 그리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