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가을 들녘에 서서 / 기청(시인 · 문예비평가)

洪 海 里 2022. 11. 23. 05:40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간결하고 담백한 선풍의 시다. 이 시의 서두를 의미상으로 풀어보면 '눈먼 자에게는

모두 아름답게 보이고 귀먹은 자에게는 모두 황홀하게 들린다'가 된다. 마음의 눈,

마음의 귀는 잡다한 현실이 아닌 본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처럼

"마음 버리면"(현상의 탐욕을 내려놓으면) 텅 빈 마음이 되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충만한 행복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을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라고 하여 불교적인 깨달음을 지향한다.

사실 우리가 괴로움이라도 말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그것을 마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생각(마음)을 내려놓으면 고총도 사라진다. 할 일을 

다 마치고 청 빈 가을 들판에서 얻은 성찰이다. 이처럼 시인의 관점에 따라 눈에 보이는

현상을 통해 내면의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것은 시가 지닌 성찰의 힘 덕분이다.

 

- 월간 《문학공간》 2022. 10월호 「詩가 있는 산문 18」.

 

 

* 이승룡 시인의 페북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