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김치, 찍다 / 해설 : 임보(시인)

洪 海 里 2023. 8. 30. 06:17
 

김치, 찍다

 

홍 해 리

 

 
싱싱하고 방방한 허연 엉덩이들
죽 늘어섰다
 
때로는 죽을 줄도 알고
죽어야 사는 법을 아는 여자
 
방긋 웃음이 푸르게 피어나는
칼 맞은 몸
 
바다의 사리를 만나
얼른 몸을 씻고
 
파 마늘 생강 고추를 거느리고
조기 새우 갈치 까나리 시종을 배경으로,
 
이제 잘 익어야지, 적당히 삭아야지
우화羽化가 아니라 죽어 사는 생生
 
갓 지은 이밥에 쭉 찢어 척
걸쳐놓고
 
김치!
 
셔터를 누른다.

 

 
* 감상 :
홍해리 시인의 시는 싱싱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시도 따라 늙기 마련인데, 홍 시인의 시는 젊음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즐겨 남성적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다봅니다.
사물들은 그의 앞에서 여성화하면서 관능적인 미를 발휘합니다.
그의 작품이 젊게 읽힌 것은 바로 그 관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치의 소재가 되는 배추를 여성으로 봅니다.
잘 다듬어진 허연 배추포기를 방방한 여인의 엉덩이라고 합니다.
배추는 간물에 담갔다 숨이 죽은 다음 김치를 답습니다.
배추는 숨이 잘 죽어야 맛있는 김치로 살아납니다.
그래서 죽을 줄도 알고, 죽어야 사는 법을 아는 여자라고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간물에 담그기 전에 배추에 칼집을 내지요?
죽어야 사는 법을 알기 때문에 배추는 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칼 맞은 몸이 방긋 싱그런 웃음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바다의 사리를 만나 몸을 씻는다는 것은 소금이 몸에 뿌려지고 소금물에 절여진 상황이지요.
절여진 배추는 가볍게 물에 헹궈진 다음 여러 가지 양념들에 버물리어 김치로 담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추는 이제 배추의 삶이 아니라 김치의 삶을 새롭게 살게 됩니다.
김치의 생명은 잘 익고 작 삭는 데 있습니다.
김치는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나는 곤충들의 화려한 변신과는 달리 풀이 죽어 축 처진 미덕을 갖춰야만 합니다.
잘 익은 김치라면 얼마나 군침이 돌게 합니까?
갓 지은 하얀 쌀밥 한 숟갈 떠서 그 위에 김치 한 가닥 쭉 찢어 얹고 씹는 그 맛!
우리는 흔히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 ‘김치!’라는 말을 외면서 셔터를 누르곤 하지요?
여기서는 맛있는 김치를 입에 넣고 환한 심정으로 두 입술을 닫고 아싹 씹는 동작을
셔터를 누른다고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씹다’ 대신 ‘찍다’로 쓰고 있습니다.
- 임 보(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