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은자의 북』1992

<시> 구멍에 대하여

洪 海 里 2005. 11. 25. 15:50



구멍에 대하여


洪 海 里

 



구멍이란 말을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시원해진다
공연히 신이 난다
신바람이 인다
여자가 사내보다 하나가 더 많다는 말도
괜스레 짜릿짜릿하게 하지만
똥을 쏘는 일이나
오줌을 싸는 일이 얼마나 통쾌한가
모든 생명은 구멍으로 존재한다
구멍에서 왔다가 구멍으로 돌아간다
식물도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동물은 또 안 그런가
우리 마음에 구멍이 없다면
모두 미친놈이 되고 만다
히히히 미친년이 되고 만다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구멍을 보라
그러나 세상에 비어 있는 구멍은 없다
가락지는 구멍이 있어 발딱발딱 숨을 쉬고
당신과 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순간과 영원을 이어주는 약속이 된다
가장 완벽한 구멍이면서 무시 당하는
0이라는 숫자의 당당한 존재를 보면
모든 숫자가 무색해질 뿐이다
모든 것을 품어 안고 소유하지 않는가
사형수를 기다리고 있는 올가미의 진실은
만 가지의 화환보다도 화려하다
금반지 보석팔찌보다도 순수하다
천체망원경 속의 광대무변한 우주도
하나의 구멍이다
실로 모든 존재가 구멍 속에서 꽃피지 않는가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구멍이 있을 뿐
구멍은 발견이요 인식이다
아름다운 자궁이다
구멍은 소리의 집이요
입이요 눈이요 코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그 안에 살아 화살을 날린다
화살은 왜 나는가
영원이란 구멍 죽음이란 구멍 삶이란 구멍
아픔이란 구멍 설움이란 구멍 사랑이란 구멍
순간이란 구멍 --- 그 구멍의 구멍을 찾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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