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문학평론> 고전정신과 인간회복의 명제 / 백결가 : 김재홍

洪 海 里 2005. 11. 29. 11:14
古典精神과 인간회복의 명제/김재홍
 

                            古典精神과 인간회복의 명제
                            ---洪海里의 「百結歌」

                                                         金載弘(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Ⅰ
 한국의 현대문학사 특히 초기 시사는 동인지 문학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동인지 활동은 형성 및 전개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1919년 「창조」지로부터 「폐허」「장미촌」「백조」「해외문학」「금성」은 물론 「시문학」「시인부락」「청록집」 등에 이르기까지 현대시의 주요 맥락은 동인지 또는 그에 준하는 문예운동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뚜렷한 이념이나 공동목표를 내세워 이념 지향성을 지니건, 혹은 인간적인 유대관계로 맺어진 친목 지향성을 띠건 간에 이러한 동인지 운동은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오고 있는 실정이다. 1946년 「백맥」으로부터 전후의 「후반기」 동인, 그리고 60년대의 「현대시」「신춘시」「청미」「여류시」「70년대」 및 80년대의 「시정신」「시운동」「오월시」 등에 이르기까지 동인활동은 아직도 현대시의 흐름에 있어서 한 시대의 특징적 경향을 대변하고 그들 나름의 방법과 지향의 고유성을 보여줌으로써 시사적 연계성의 한 기틀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특히 이러한 동인지가 무크지의 성격을 지니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시창작만이 아닌 범문학/문화운동으로 확대돼 가고 있는 것을 눈여겨볼 수 있다.
 『진단시』는 80년대 들어서서 태동된 시창작 동인지이다. 1982년에 첫 동인시집 「서동」을 내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동동」(1982), 「배비장」(1983), 「온달」(1983), 「정읍사」(1984), 「도깨비」(1984), 「서낭당」(1985), 「말뚝이」(1985), 「수로부인」(1986) 등 지금까지 9권의 동인시지를 간행하는 의욕을 과시한 80년대의 대표적 동인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의욕적인 창작활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다. 이들은 매 시집마다 우리의 전통적 자산 속에서 특이한 개성을 지닌 인물, 풍속, 문학작품, 민속 등을 공동제재로 한 테마시집을 선보여왔다는 점에서 주목을 환기하는 것이다. 필자는 연전에 거듭하여 지금 이 시대의 동인지가 ①주제시집을 묶어 시적 대상과 주제를 깊이있게 천착할 것 ②「삼국유사」 등 고전저작을 여럿이 나누어 연작시집으로 꾸미는 방법 ③공동의 창작·공동연구작업전개 ④과감한 지면개방으로 매너리즘의 극복 ⑤시낭송회 등을 열어 독자와의 연대감 확보 등에 힘써야 할 것 (시와 진실, 이우출판사, 1984. pp.115-6)등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진단시』의 테마시 창작작업, 지속적인 작업이야말로 동인지 가운데서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고 확신한다.

                                                   Ⅱ
 『진단시』의 10번째 테마는 '百結'이다. 백결 선생은 신라 자비왕 때 경주 낭산 기슭에 살던 거문고의 명수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너무나 가난하여 옷을 백여 번이나 기워서 입었기 때문에 백결 선생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가 섣달 그믐날 떡방아 대신에 아악(雅樂)을 작곡하여 가난에 지친 아내를 음악으로 따뜻하게 위로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진단시』 동인들이 10집을 '백결'로 정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온갖 욕망의 기름때와 상업주의의 공해에 절어있는 현대적 삶에 있어서 '백결'이 상징하는 청빈한 삶의 편안함과 그 따뜻함이야말로 소중하고 간절한 삶의 자세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난한 예술가 백결 선생의 이미지는 오늘날 현대의 기계문명과 상업주의 위압 속에서 시혼을 가꾸어 가는 이 땅의 가난한 시인들, 특히 현실적인 설득력이 별반 없어 보이는 고전정신의 탐구작업을 조용하게 전개하고 있는 『진단시』 동인들의 모습을 상징한 대리자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洪海里의 「百結歌」는 정석대로 백결 선생을 노래한다. 먼저 Ⅰ연에서는 백결의 음악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묘사한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천지간 
     소리란 소리
     다 모아서 
     곡을 지으리라
     한번도 울어 본 적이 없는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소리
     하늘이 반주하고
     산과 바다가 노래하는
     곡을 엮으리라
     가슴이 비어 잇는 
     이 시대를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여기에서는 백결의 음악이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인간의 화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어 있는 시대', 즉 불행한 시대의 불우한 삶을 위한 위안의 음악이며, 힘의 음악이라는 점을 함께 강조한다. 백결의 음악은 단순한 藝枝가 아니라 魂의 양식이며 정신의 솟구침이라는 점을 밝혀준 것이다.
 둘째 연에서 거문고 뜯는 소리와 떡을 치는 방아소리를 함께 오버랩하여 사실감을 더해준다.

     떡을 치세 떡을 치세
     쿠웅 따악 쿠웅 따악
     떡을 치세 떡을 치세
     이 떡을 쳐 누굴 주나
     맘씨 고운 이웃들과
     고루고루 나눠 먹세
     해가 가고 바뀌어도
     인정만은 변치 마세
     있는 놈은 있는 대로 
     없는 놈은 없는 대로
     변함 없는 세상살이
     그 누구를 원망하랴
     금방아로 은방아로
     있는 놈들 방아타령
     요란한들 무엇하며
     배고프고 괴로운들
     이 내 팔자 별수없네
     달을 따다 떡을 빚고
     별을 따서 떡을 치세
     바람 잡아 곡조 짓고
     마주 앉아 가난 타니
     곡조마다 가슴 치네
     집안 가득 동네 가득
     나라 가득 하늘까지
     해 저무는 길목에서
     동터오는 고샅까지
     가난이야 나랏님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아침부터 밤늦도록
     고운 소리 떡을 쳐도 
     입은 흉년 귀는 풍년
     세상인심 사나워도
     거문고를 마주하면
     부러울 것 하나 없네
     이승이 곧 별천지라
     한 자 한 자 각을 하듯
     뜯어내는 맑은 곡조
     떡을 치세 떡을 치세.

 4/4조로 리듬을 이끌어간 것부터가 다분히 의도적인 이 부분은 거문고로 뜯어내리는 방아타령이 실제로 떡을 치는 떡방아 소리와 함께 어울어져서 생활과 예술의 행복한 일치를 보여준다. 인생고의 아픔이 예술적인 승화를 성취함으로써 정신적인 극복의 아름다움을 제시해 준 것이다. 「이승이 곧 별천지라」고 하는 구절 속에서 고통스런 세속의 삶이 신성사적인 예술로 상승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다시 3연에서는 전체적인 해석이 제시된다.

     배부른 귀에 들릴 리 없는
     울리지 않는 곡조
     가슴으로 뜯으면
     세밑에서
     오동나무가 운다
     봉황이 울도록
     여섯 줄 뼈끝으로 튕겨도
     하늘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
     따끝이 멀어 들리지 않는다
     아아 더 먼먼 사람의 나라
     비어 있음을 위하여
     이 가슴을 다 쏟아
     내 영혼의 모음을 다 모아
     곡을 지으리라
     곡을 지으리라.

 이 시의 참뜻은 바로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비어 있음의 가득함에 대한 깨달음이며, 가난한 진실의 따뜻함이자 그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백결의 방아타령은 배부른 사람에게는 한낱 여기적인 예술에 불과하지만 배고픈 자, 가난한 사람에게는 혼의 울림이며 영혼의 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에는 현대 같이 황금만능/물질만능이 풍미하는 시대에 있어서 정신적인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또 아름다운 것인가를 강조하는 속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아울러 洪海里의 시에는 「서동요」처럼 참된 사랑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동동」에서처럼 순결한 사랑에 대한 강조가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온달」에서는 바보스럽지만 진실을 간직한 인간의 소중함이, 「배비장」에는 허풍스런 사내의 실속없음과 그 순수함이 각각 제시된다. 특히 「정읍사」에는 부부의 정이 이름답게 아로새겨져 있으며, 「도깨비」에서는 맥빠진 현대적 삶에 대해 긴장을 불어넣는 도깨비의 충격이 싱싱하게 묘파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Ⅲ
 시단에 있어서 동인지 운동은 그 찬반양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동인운동이란 외부적으로는 하나의 에꼴 형성이며 내부적으로는 작품 활동의 촉진제이자 인간관계의 활력소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동인 활동은 어느 면 보수적인 속성을 지니는 제도적 문학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촉매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신문학 초창기뿐만 아니라 근년에도 이러한 동인지 운동 내지 무크지 운동이 지속화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들이 기성문단에 활력과 탄력을 불어넣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앞에서 대략 살펴본 것처럼 『진단시』동인지는 근년의 동인지 가운데에서 가장 바람직한 일면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전통적인 고전정신과 민족정서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오늘날 외래지향적일변도의 추세속에서 우리의 것, 전통적인 것에 대한 주체적·능동적 인식이 제기 되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한 이 동인시집은 하나의 제제 또는 주제에 대해 연작시집의 성격을 지님으로써 시적 탐구의 녋이와 깊이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놓여진다. 이즈음의 많은 동인지 내지 시집들이 단편적인 시모음 또는 구멍가게식 잡화점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주제가 뚜렷한 이 연작 시집은 탐구하는 정신의 깊이를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들 동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으면서도 크게 보아 그 시적 탐구의 주제가 ‘인간성 회복의 명제’또는‘자유로운 정신적인 삶 추구’라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꼴의 일반성이 확보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화려한 구호를 내걸어나 각광을 받으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숨겨진 진실을 내밀하게 갈고 닦아간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에서 앞으로 『진단시』는 역사의 산맥, 고전의 바다를 보다 체계적·조직적인 탐구를 보여준다면 바람직하게 발전해 갈 것으로 이해된다. 굳이 문학적인 인물이나 테마 혹은 민족풍물에 국한하지 말고 역사적인 사건·사실· 인물로 확대되어 감으로써 삶의 총체성을 보다 거시적·입체적으로 파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역사의식, 인간의식, 예술의식의 면에서 보다 열려진 정신을 탐구해야 하리라 생각된다. 아울러 자칫 복고취미 내지는 과거지향적인 함몰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적인 삶과 능동적으로 연결됨으로써 탄력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과거의 전통탐구가 현실의식 내지 미래 지향적인 것과 탄력있게 결합될 때 보다 이념적인 정신의 성취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낭송회 등을 열어 대중과 친화력을 강화하는 방안도 적극적 연구·실행돼야 할 것이다.  이제 10집을 냄으로써 『진단시』는 보다 준렬한 자기반성을 보여주어야 할 소중한 시점에 접어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자기비판이 준렬할수록 새롭게 힘찬 도약이 이루어질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쪼록 『진단시』가 이땅 시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뿌리깊은 나무로써 크고 무성하게 성장하여 아름답고 틈실한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기원한다.

                                                   『現代詩와 전통의식』(문학예술.1991)

                                                    『진단시』(제10집, 민족문화사,1987))

*참고로 洪海里의 테마詩「서동요」「동동」「온달」「배비장」「도깨비」의 전문을 게재합니다.


   서동요(薯童謠)

    1
  천의 아이들 입마다
  불을 밝혀서

  서라벌 고샅마다
  밤을 밝히던

  사랑 앞엔
  국경도 총칼도 없어

  오로지 타오르는
  불꽃 있을 뿐

  사랑도 그적이면
  꽃이였어라.

     3
  사랑 앞에선
  황금도 돌무더기
  신라 천년
  사랑 천년
  그 언저리
  노랫소리
  들려요 들려요
  그대
  옆구리 간질이던
  바람
  아직도 가슴에 타고
  서라벌 나무 이파리
  하나
  흔들리고 있어요
  고샅마다
  아롱아롱 일어나는
  아지랑이
  몽롱한 꿈자리
  보여요 보여요.

     3
  6월이 오면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지만
  시멘트 철근의 숲은
  오염에 젖어 있고
  흐린 하늘 아래'
  아래만 살아남은 뜨거운 사랑
  순간접착제
  뻥튀긴 강정
  불꽃만 요란하고
  식은 잿더미가 골목마다 쌓인다
  별이 뜨지 않는
  매연의 거리
  이제 사랑도 별볼일 없어
  찍어 바르고
  문지르고 두드려
  저마다 몇 개의 탈을 쓰고
  거리마다 서성댄다
  소리의 집만 무성한 잡초덤불
  깨어진 거울조각이
  시대의 흙 속에 묻힌다.


       동동(動動)

     1
  다 비어 있는 소리
  요란한 고요 속에
  둥둥둥 울리는
  적막으로 읊는
  노래여.

     2
  요즘 봄 가을이 어디 있나요
  봄인가 하면
  무더위 기승 떠는 한여름이요
  가을인가 하면
  동장군 날뛰는 한겨울이니
  이제는 사랑도 그렇지요
  눈맞았다 하면
  불붙어 타오르고
  결혼했다 하면 이혼이니
  일년 열두달 삼백육십오일
  그대 생각에 잠 못 이루고
  피 말리고 가슴 태워
  세상 밝힐 일이 어디 있나요 
  여름이 가면
  가을을 앓기 마련이요
  겨울이 가면
  봄바람에 흔들리지만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멀리 눈을 주리라
  살고 죽는 일을 어이하리야
  입을 열 때마다
  꽃잎이 날아오르는, 그래서
  꽃잎마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그대 앞에 벙어리 되어
  무작정 서 있어도 보리라.


       온달

  온달은 큰 달
  보름달인데 세상이 어둡어요
  어두울수록
  꿈으로 오는 말발굽소리
  더욱 똗똑히 가슴을 울려요
  어머니,
  공주의 남편이면 뭘하고
  임금의 사위가 되면 뭘하나요
  그냥 어머니의 아들
  바보 아들이면 그만이지요
  무수히 날아와 박히는 돌멩이
  등바닥이 과녁이 되어
  웃음거리가 되어도
  이 세상 끝에라도 설 수 잇다면
  어머니,
  이 밤도 피리를 불어
  저 무수한 별들을 빛나게 하고
  길을 떠나야지요
  어차피 사는 일이 속수무책
  등 시려운 눈물의 시대
  이 세상 끝끝에라도 설 수 있다면
  설 수만 있다면.


       배비장(裵碑將)

      1
  한라산 된바람도 잠이 들도록
  달리는 말 엉덩이를 빛내기 위하여,

  제주 바다 푸른 물결 넘실대도록
  안개 속에 벌거벗고 춤을 추기 위하여,

  풀꽃바다 울긋불긋 뭉개지도록
  거웃으로 두덩불 다스리기 위하여,

  새, 하늬, 높새, 마파람결에
  한낱 일순 파리목숨 날리기 위하여,

  세상 사람 모두 눈뜬 장님이 되도록
  이제 물거품이 되기 위하여,

  어둠 속에 타는 불꽃 사그러들도록
  허허허 허허허 크게 한번 웃기 위하여.

      2
  나, 배서방, 비장으로서
  초가삼간 다 태우고
  빈대 한 마리 잡지 못 햇으니,

      3
  회오리, 소소리에 쓸리고 찢기운 채
  굴러 떨어지고
  깨어져 박살나고 말았느니,

      4
  오, 저 높은 담 깊은 속
  피는 꽃을 보아라
  온누리 타는 저 향기를 어이랴
  해 저물면 어둠이 눈을 가리고
  귀마저 막아버려도
  길 잘든 저 꽃들은 저대로 피어
  타오르누나
  타오르누나!


        정읍사

     1.사내의 말

  나라가 저자요
  저자가 젖었으니
  내 어찌 젖지 않을 수 있으랴
  밝디 밝던 달빛 사라지고
  어둔 길 홀로 돌아가네
  한낱 꿈길이라는 인생살이
  눈물나라일 뿐인가
  떨어진 미투리
  버선목의 때
  가래톳이 서도록 헤매여도
  술구기 한 두 잔에 정을 퍼주는
  들병이의 살꽃
  한 송이 꺾지 못하고
  빈대 벼룩에 잠 못 이룰 때 
  주막집 흙벽마다
  붉은 난초만 치네
  풀어진 신들메
  황토길 넘어가는 칼칼한 목
  정 어리는 주모
  방구리 인 통지기
  아랫품 해우채도 못되는
  등짐만 허우적이며
  저자거리에 젖어 있는
  나 이제 돌아가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2.계집의 말 

  달돋는 밤이 오면
  산 위에 서네

  고갯마루 목 빠지게
  머리푼 달빛만이 천지에 아득하고

  저자거리 아랬녘 장수
  허방다리 허물어지던

  당신의 그림자
  중다버지 떠돌이 더펄더펄

  밤이면 눈물로 젖고
  낮이면 돌로 서네

  가슴에 지는 꽃잎 새 되어 날아
  젖은 날개 퍼덕일 때

  당신 계신 젖은 나라
  햇빛나라 금빛나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도깨비

    1
  어느 나라에선 혹달린 사람들이 씨름을 하고 있다 한다. 혹도 보통 혹이 아닌 이상한 혹을 하나도 아닌 몇 개씩 달고 있는 사람들이라 한다. 절구질, 낚시걸이, 배지기, 허리죄기. 덧걸이, 손홀치기, 등치기, 다리채기, 팔걸이, 잡채기, 호미걸이, 빗장걸이는 다 제쳐두고 때리고, 쥐어뜯고, 찌르고, 목 조르고, 귀 잡아당기고, 배 차고, 불알 잡아채고, 손가락을 비틀고, 물어뜯는 기술만 쓰고 있다 한다. 혹 속에 방망이가 들어 있는지 금 나와라, 뚝딱! 힘 나와라, 뚝딱! 휘두르면서 삿바도 없이 밤낮으로 씨름을 하고 있다 한다.

    2
  삭삭삭! 쓱싹쓱싹!
  칼을 갈고 있다
  시퍼렇게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다
  달빛에 비쳐보고
  별빛마다 비쳐보며
  밤새도록.

  싹싹싹! 싸악싸악!
  마당을 쓸고 있다
  마음까지도
  눈이 와도
  바람 불고 비가 와도
  마당을 쓸고 있다
  밤새도록.

  히히히! 이히히히!
  은 웃음을 웃고 있다
  푸르게 푸르게 웃고 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웃고 있다
  밤새도록.

  쩡쩡쩡! 딱딱딱!
  돌을 깨고 다듬어
  다리를 놓고 있다
  큰 돌, 작은 돌, 모난 돌,
  돌다리를 놓고 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하여
  밤새도록.

  화악 화악!
  불을 밝히고 있다
  여기저기서
  푸른 불빛이 솟아오르고
  수십 개의 불꽃이
  수백 수천 개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피고 있다
  밤새도록.

  번쩍번쩍!
  외눈을 닦는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다 보려고
  방울방울 왕방울 외눈을
  닦고 또 닦는다
  눈을 닦는다 밤새도록.
                   
               시집 『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