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 12

《우리詩》2022. 12월호 '홍해리 신작 소시집'에서

♧ 나는 날마다 무덤을 짓는다 해가 지면 문을 닫고 하루를 접는다 하루는 또 하나의 종점 나는 하나의 무덤을 짓는다 문 연 채 죽는 것이 싫어 저녁이면 대문부터 창문까지 닫고 다 걸어 잠근 고립무원의 지상낙원을 만드노니 둘이 살다, 셋, 넷, 다섯, 이제는 다들 떠나가고 나만 혼자, 홀로, 살다보니 집이 천국의 무덤이 되었다. ♧ 단현斷絃 줄 하나 끊어지니 천하에 소리가 나지 않네 내 귀가 먹은 것인지 내일 없는 어제가 가슴을 치니 잠이 안 와 괴롭고 잠들면 꿈으로 곤비하네 말이 안 되는 세상이라도 물 흐르듯 바람 일 듯 영혼은 이제 유목민으로나 두 집 건너 살아라 산산 강강 살아라 그렇게나 가야지 노량으로 가야지. ♧ 적멸보궁 밤새껏 폭설이 내린 이른 아침 부산한 고요의 투명함 한 마리 까치 소리에 툭..

늙마의 봄 · 2

늙마의 봄 · 2 홍 해 리 나일 먹고 또 나이 들어도 그림 속 떡을 보고 침을 흘리고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할 일인데 왜 아직도 내 배가 아픈 것인가 어느새 깨복쟁이 멱감던 개울가를 돌아보고 사철나무 서 있던 우물가를 서성이는 늙마의 봄이 오니 볼 장 다 보고 나서도 휘영청 달 밝은 밤이 되면 하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데 봄이 오면 정녕 고목에도 꽃이 피는 그곳으로 발밤발밤 가 볼 것인가 발바투 달려갈 것인가 무한 적막은 어떻게 잡고 영원은 또 언제 그릴 것인가 봄이 와도 봄이 아닌 나의 봄이여. - 계간 《창작21》 2024. 봄호.

얼음폭포

얼음폭포 洪 海 里 천년을 소리쳐도 알아듣는 이 없어 하얗게 목이 쉰 폭포는 내리쏟는 한 정신으로 마침내 얼어붙어 바보 경전이 되었다. -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2016, 도서출판 움) * 얼어붙은 폭포를 노래하였다. 마음이 울린다. 그러다가 한동안 마음이 얼어붙는다. 왜 이 시는 따뜻한가. 폭포를 보고 말하되 폭포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인의 ‘인간을 향한 감수성’이 폭포와 함께 떨어지다가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읽는 이의 마음도 폭포처럼 목이 쉬도록 경전을 읽다가 얼어붙고 마는 것이다. 시는 풍경화만으로 끝났을 때는 읽은 이의 마음을 울릴 수 없다. 독자의 마음을 울릴 수가 없다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독자들은 그 시를 좋은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 사..

지금 여기

지금 여기 洪 海 里 이곳 내 생生의 한가운데 어제도 내일도 없는 거지중천居之中天 별 하나 반짝이고 있네. 지금 여기 홍 해 리 이곳 내 生의 한가운데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네 거지중천居之中天에 별 하나 반짝이고 있네. *ㅔ : 데/ 네/ 에/ 네 지금 여기 홍 해 리 이곳 내 生의 한가운데 어제도 내일도 없는 거지중천居之中天에 별 하나 반짝이고 있는. * 데/ 는/ 에/ 는.

매화꽃 피고 지고

정옥임(시인). 매화꽃 피고 지고 홍 해 리 심학규가 왕비인 딸 청이 앞에서 눈을 끔적끔쩍 세상을 보듯 매화나무가 겨우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 아니라 천등만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가지마다 암향暗香이 맑고 푸르다 다글다글 꽃봉오리가 내뿜는 기운으로 어질어질 어질머리가 났다 계집이 죽었는지 자식이 죽었는지 뒷산에서 구성지게 울어쌓는 멧비둘기 봄날이 나울나울 기울고 있다 시인은 매화꽃이 두근두근 댄다고 했다 꽃 터지는 소리가 그만 절창이라고 했다 한 사내를 사랑한 여인의 가슴이 삼복三伏 염천炎天이어서 두향杜香이는 죽어서도 천년 매화꽃 싸늘하게 피우고 있다 - 「매화꽃 피고 지고」 전문 홍해리 선생님은 이번에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라는 치매 연작시집 4권째를 내셨다. 제1시집 『치매행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