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그늘에서 복사꽃 그늘에서 홍 해 리 돌아서서 새실새실 웃기만 하던 계집애 여린 봄날을 후리러 언제 집을 뛰쳐나왔는지 바람도 그물에 와 걸리고 마는 대낮 연분홍 맨몸으로 팔락이고 있네. 신산한 적막강산 어지러운 꿈자리 노곤히 잠드는 꿈속에 길이 있다고 심란한 사내 달려가는 허공으로 언..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詩를 먹다 詩를 먹다 홍 해 리 시집『봄, 벼락치다』가 나온 날 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거기가 여기인 초월의 세상, 꿈속에서였다 아흔아홉 편의 시를 몽땅 먹어치웠다 그래도 전혀 배가 부르지 않았다 이밥을 아흔아홉 사발을 퍼먹었더라면 아니 아흔아홉 숟가락만 떠먹었어도 배가 남..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미루나무 미루나무 홍 해 리 1 반짝이는 푸른 모자 팍팍한 둑길 홀로 휘적휘적 걸어가던 아버지. 2 새로 난 신작로 차 지날 때마다 뽀얀 먼지 뒤집어쓴 채 멍하니 서 있던 아버지.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물의 뼈 물의 뼈 홍 해 리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 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능소화 능소화 홍 해 리 언제 바르게 살아 본 적 있었던가 평생 사내에게 빌붙어 살면서도 빌어먹을 년! 그래도 그거 하나는 세어서 밤낮없이 그 짓거리로 세월을 낚다 진이 다 빠져 축 늘어져서도 단내를 풍기며 흔들리고 있네. 마음 빼앗기고 몸도 준 사내에게 너 아니면 못 산다고 목을 옥죄고..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만월滿月 만월滿月 홍 해 리 널 바라보던 내 마음이나 네 작은 가슴이 저랬더랬지 달빛 실실 풀리어 하늘거리는 비단 옷자락 안개 속에서 너는 저고리 고름을 풀고 치마를 벗고 있었지 첫날밤 연지 곤지 다 지워지고 불 꺼진 환한 방안 열다섯에 속이 꽉 차서 보름사리 출렁이는 파돗소리 높았었지..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지족知足 지족知足 홍 해 리 나무는 한 해에 하나의 파문波紋을 제 몸속에 만든다 그것이 나무의 지분知分이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나무는 홀로 자신만의 호수를 조용히 기르는 것이다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개망초꽃 추억 개망초꽃 추억 홍 해 리 막걸리 한잔에 가슴 따숩던 어둡고 춥던 육십년대 술 마셔 주고 안주 비우는 일로 밥벌이하던 적이 있었지 서문동 골목길의 막걸리집 인심 좋고 몸피 푸짐한 뚱띵이 주모 만나다 보면 정이 든다고 자그맣고 음전하던 심한 사투리 경상도 계집애 좋아한다 말은 못..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김치, 찍다 김치, 찍다 홍 해 리 싱싱하고 방방한 허연 엉덩이들 죽 늘어섰다 때로는 죽을 줄도 알고 죽어야 사는 법을 아는 여자 방긋 웃음이 푸르게 피어나는 칼 맞은 몸 바다의 사리를 만나 한숨 자고 나서 얼른 몸을 씻고 파 마늘 생강 고추를 거느리고 조기 새우 갈치 까나리 시종을 배경으로, 잘..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
몸 몸 홍 해 리 씨앗 하나 빌려 지은 작은 집 조금씩 늘이고 늘려가며 살다 보면 조금씩 흔들리고 기울기 마련이지만 지붕이 헐어 물이 새고 틈새로 세월의 새가 날아가고 있다 비바람 눈보라 들이치는 문짝 구멍 난 벽마다 쥐들이 드나들고 기둥도 오래 되어 좀먹고 내려앉았다 수도관 가스.. 詩選集『비타민 詩』2008 2008.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