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553

표사의 글

강우현 시집 『반항을 접은 노을처럼』 表辭 한마디로 우현의 시는 슬프고 아프다. 아파서 푸르고 슬퍼서 순수하고 또한 아름답다. 그래서 우현의 시에는 푸른 향기가 배어 있어 읽을수록 맛이 난다. 주변의 여러 대상, 즉 그의 우주와 내면 풍경을 통찰하여 신선한 은유로 묘사 하는 솜씨가 놀랍고 동원되는 어휘의 연결이 가관이다. 언어가 형태를 이루어 살아 있는 시로 의미를 나타낼 때 시는 한 개의 몸이 된다. 그 몸에서 우현이 들려주고자 하는 이치가 무엇일까 탐색하는 재미는 우리의 몫이다. 순수하지 못한 시가 넘쳐나는 시대에 잡스러운 시가 아닌 진솔한 시를 쓰는 훌륭한 시인으로 독자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시인이 되길 기대하며 두 번째 시집에 꽃 한 송이 얹어 축하의 말씀을 갈음한다. - 洪海里(시인) ..

호박 / 김포신문 2022. 09. 16.

김포신문 2022. 09. 16. 호박 洪 海 里 한 자리에 앉아 폭삭 늙었다 한때는 푸른 기운으로 이리저리 손 흔들며 죽죽 뻗어나갔지 얼마나 헤맸던가! 방방한 엉덩이 숨겨놓고 활개를 쳤지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기도 했지 사람이 눈멀고 반하는 것도 한때 꽃피던 시절 꺽정이 같은 떠돌이 사내 만나 천둥치고 벼락치는 날갯짓 소리에 그만 혼이 나갔겠다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지 숱한 자식들 품고 살다 보니 한평생이 별것 아니더라고 구르는 돌멩이처럼 떠돌던 빈털털이 돌이 아범 돌아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뱉고 있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 돌담 위에 앉아 계시다. - 시집『황금감옥』(2008, 우리글) * 감상 밭에, 산길에, 아파트 화단에, 노란 호박꽃이 피었다. 중간중간 애호박도 ..

이 겨울엔 / 한경 The Pen, 2022.01.18.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이 겨울엔 / 홍해리 강성위 필진기자 입력2022.01.18. 이 겨울엔 홍 해 리 이 겨울엔 무작정 집을 나서자 흰 눈이 천지 가득 내려 쌓이고 수정 맑은 물소리도 들려오는데 먼 저녁 등불이 가슴마다 켜지면 맞아주지 않을 이 어디 있으랴 이 겨울엔 무작정 길 위에 서자. [태헌의 한역] 此冬(차동) 此冬不問出宇庭(차동불문출우정) 白雪飛下滿地積(백설비하만지적) 淸如水晶水聲聽(청여수정수성청) 遠處夕燈心心亮(원처석등심심량) 世上何人不迎君(세상하인불영군) 此冬不問立途上(차동불문립도상) [주석] * 此冬(차동) : 이 겨울, 이 겨울에. 不問(불문) : 묻지 말고, 무작정. / 出宇庭(출우정) : 집을 나서다. ‘宇庭’은 집과 뜰이라는 뜻인데 ‘집’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白雪(백..

비 그친 우후 / 경상매일신문, 2022.08.01.

비 그친 오후 / 홍해리 - 선연가嬋娟歌 경상매일신문 기자 / gsm333@hanmail.net입력 : 2022년 08월 01일 집을 비운 사이 초록빛 탱글탱글 빛나던 청매실 절로 다 떨어지고 그 자리 매미가 오셨다, 떼로 몰려 오셨다 조용하던 매화나무 가도 가도 끝없는 한낮의 넘쳐나는 소리, 소낙비 소리로, 나무 아래 다물다물 쌓이고 있다 눈물 젖은 손수건을 말리며 한평생을 노래로 재고 있는 매미들, 단가로 다듬어 완창을 뽑아대는데, 그만, 투명한 손수건이 하염없이 또 젖고 젖어, 세상 모르고 제 세월을 만난 듯 쨍쨍하게 풀고 우려내면서 매미도 한철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인가 비 그친 오후 일제히 뽑아내는 한줄기 매미소리가 문득 매화나무를 떠안고 가는 서녘 하늘 아래 어디선가 심봉사 눈 뜨는 소리로 연..

星巖 여국현 시집『들리나요』표사

星巖 여국현 시집 『들리나요』 성암 여국현은 시인 영문학자이다. ‘예술은 별[星]처럼, 학문은 바위[巖]처럼’이란 아호처럼 그의 시는 스스로 빛나고 무등 단단하다. 그는 “갈대와/ 바람이/ 서로 안고 한 세상 어울리는 것”이라고 이번 시집 첫 번째 작품인 「갈대와 바람」의 마지막 연에서 노래하고 있고 「갈대에게 배우다」에도 갈대가 등장하고 있다. 갈대는 바로 사람이고 바람은 세상이다.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짧고 재미있고 깊은 말로 맛있게 그려낸 것이 바로 성암의 시편들이다. 다시 말해 그가 아침 저녁으로 즐기고 있는 천변 산책에서 만나는 자연과 그의 발바닥이 사유한 내용을 삶의 근본적인 문제와 교직해서 보여 주는 것이 별처럼 빛나는 성암의 시가 아닌가 한다. 생의 언덕을 넘는 일이 아득하지만..

촐촐하다 : 홍해리 / 이동훈(시인)

촐촐하다 홍 해 리 깊은 겨울밤 잠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누가 술상이라도 보는가 생각은 벌써 술잔에서 촐촐 넘치고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곁엔 잠에 빠진 아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 『마음이 지워지다』, 놀북, 2021. 홍해리 시인은 치매에 이른 아내를 옆에서 돌보면서, 일종의 간병기(看病記)와 같은 421편의 시를 네 권의 시집으로 묶어서 출간한 바 있다. 홍해리 시인에게 시 쓰는 일은 평생을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해온 일이기도 했지만, 치매행 관련 시집은 치매 가족이나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한 땀 한 땀 깁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육필 시다. 『마음이 지워지다』는 기존의 네 권 시집에서 출판사 놀북이 가려 뽑은 11..

윤정구 시인의 부채 詩 : 홍해리「가을 들녘에 서서」

* 홍해리 시 [가을 들녘에 서서] 윤정구 부채글씨 윤정구 부채시와 시인 ​ 홍해리 시 [가을 들녘에 서서] 윤정구 부채글씨 *문창19년겨울 홍해리 시인 노을빛 감성 황홀한, 순수의 대명사 ​ 홍해리 시인은 임보 시인과 더불어 우이시(牛耳詩)의 설립자요, 실질적인 운영자이다. 임보를 일러 ‘구름 위에 앉아 마술부채로 시를 빚는 시도사(詩道士)’라 부르고, 홍해리는 ‘애란가(愛蘭歌)를 부르며 불도저를 모는 난정법사(蘭丁法士)’라 한 어느 시인의 싯구와 ‘성미가 곧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초심을 지켜’ 간다는 주위의 말대로 어지러운 시대에도 홍해리 시인은 우이동을 청정지대로 지켜가고 있다. 평생 지우(知友)였던 이무원 시인은 홍해리 시인을 ‘그는 풀로 말하면 난이요, 나무로 말하면 매화다. …두루 뭉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