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561

청산은 나를 보고 / 대경일보 2023.09.10.

[아침의 시 산책] 입력 2023.09.10. 청산은 나를 보고 - 나옹懶翁선사 흉내 내기 洪 海 里 부모님 나를 보고 바르게 살라 하고 자식들 나를 보고 꿋꿋이 살라 하네 출세도 벗어 놓고 권세도 벗어 놓고 산처럼 바다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아내는 나를 보고 다정히 살라 하고 친구들 나를 보고 신의로 살라 하네 독선도 벗어 놓고 이기도 벗어 놓고 땅처럼 하늘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의 시는 언제 보아도 맑은 기운이 넘쳐난다. 이 시를 패러디한 홍해리 시인도 그러하다.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는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이다. 이름은 혜근(慧勤), 법호는 나옹, 호는 강월헌(江月軒)인데 선사의 나이 21세 때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

윤슬 / 대경일보 2023.09.03.

대경일보 / 2023.09.03. [아침의 시 산책] 윤슬 / 홍해리 기자명 권수진 기자 입력 2023.09.03 15:13 대부도 가자 하고 오다 보니 선재도 사는 일 정해진 것 어디 있으랴 가는 곳도 모른 채 흐를지라도 사랑 또한 과연 이와 같아서 너와 나 가는 길 하나이거라 멀리서 반짝이던 작은 물비늘 밤새워 철썩이는 파도가 되니 때로는 밤 바닷가 홀로 앉아서 별도 달도 없어도 바달 품어라 갈매기도 다 잠든 선재도 바다 물결만 홀로 깨어 보채 쌓누나.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일컫는 순우리말을 ‘윤슬’이라고 한다. 강가를 산책한다. 어슬녘 강가의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머리를 쓸어 올릴 때 윤슬이 눈에 들어온다. 그 잔물결의 반짝임을 보고 있노라면 윤슬의 ‘작은 물비늘’이 이끄..

김치, 찍다 / 해설 : 임보(시인)

김치, 찍다 홍 해 리 싱싱하고 방방한 허연 엉덩이들 죽 늘어섰다 때로는 죽을 줄도 알고 죽어야 사는 법을 아는 여자 방긋 웃음이 푸르게 피어나는 칼 맞은 몸 바다의 사리를 만나 얼른 몸을 씻고 파 마늘 생강 고추를 거느리고 조기 새우 갈치 까나리 시종을 배경으로, 이제 잘 익어야지, 적당히 삭아야지 우화羽化가 아니라 죽어 사는 생生 갓 지은 이밥에 쭉 찢어 척 걸쳐놓고 김치! 셔터를 누른다. * 감상 : 홍해리 시인의 시는 싱싱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시도 따라 늙기 마련인데, 홍 시인의 시는 젊음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즐겨 남성적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다봅니다. 사물들은 그의 앞에서 여성화하면서 관능적인 미를 발휘합니다. 그의 작품이 젊게 읽힌 것은 바로 그 관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

개화, 세계의 열림 / 충북일보 2023.03.19./ 김정범 시인

개화, 세계의 열림 충북일보 2023. 03.19. 김정범(시인) 확실히 봄이다. 창밖의 나뭇가지에 붉은 꽃이 피어 있다. 홍매화다. 그 옆의 목련과 개나리가 봉오리를 맺는다. 아직 꽃잎을 열기 전의 여린 모습이다. 어디서 날아왔나. 꿀벌 여러 마리가 화분과 꿀을 채집한다. 하나의 자연이 움직이는 데는 우주의 모든 힘이 관여한다.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내리고 나는 잠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표지 빛깔이 고운 시집을 편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매화나무 풍경이 운다 아득한 경계를 넘어 가도 가도 사막길 같은 날 물고기가 눈을 뜬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꽃 피는 소리에 놀라 허공에서 몸뚱이를 가만가만 흔들고 있다 꽃그늘에 앉아 술잔마다 꽃배를 띄우던 소인묵객들 마음 빼앗겨 잠시 ..

바다에 홀로 앉아

바다에 홀로 앉아 洪 海 里 도동항 막걸리집 마루에 앉아 수평선이 까맣게 저물 때까지 수평선이 사라질 때까지 바다만 바라다봅니다 두 눈이 파랗게 물들어 바다가 될 때까지 다시 수평선이 떠오를 때까지. // 요즈음 신기한 대회가 이따금 열린다. 일명 '멍 때리기' 대회다. 그런데 이 멍 때리기가 기억력, 학습력, 창의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코넬대의 연구 보고가 있었다. 이 시의 화자는 왜 바다를 바라볼까? 아마 잊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일과 직장과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과... 그 모든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낸 인과를 잠시 벗어나 정신을 쉬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멍 때리는 것은 무료하고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멍 때리기가 필요하다. - 이해우(2023.06.11). * 김미경 님..

하동여정河東餘情

하동여정河東餘情 洪 海 里 보리누름 지나고 모내기 마치면 섬진강 끌고 노는 버들전어 떼 물위로 반짝, 반짝, 몸을 던지지 색시비 내리는 날 배를 띄우고 무람없는 악동들 물치마 열면 사내들의 몸에선 밤꽃이 솟네. - 시집『독종』(2012, 북인) * 짧고도 명명창창한 이 서경을 무엇으로 표현 할까. 리뷰를 하고 싶은데 극심한 언어부족을 절감한다. 배를 끄는 것은 사람일진대 버들전 어가 섬진강을 끌고 놀다니. 번쩍번쩍 몸을 던 져 은빛춤을 추는데 색시비는 또 내리고 ……. 시집『독종 』에는 말 그대로 '독종'의 시편들이 많다. 어디서 맞닥뜨리지 못한 깊고 깊은 시편 80여 수가 모두 이렇다. 시인의 타 시집들도 그랬듯 지독히도 끈끈한 사랑, 슬픔도 기쁨도 죄다 따뜻하게 구현되어 긴 여운을 주고 있다. 한 줄..

남대희 시집『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 表辭

남대희 시집 표사 시집을 받으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시인의 말」이다. 이 시집 머리에 시인은 "처음에 나는/ 시詩가/ 세상의 꿈이고 희망이었으면 했다// 지금도 그렇다."라는 짧은 말씀을 올렸다. 시를 보면 그것을 쓴 사람이 보이기도 하는데 남 시인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시는 시인이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흔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의 눈으로 본 자연과 주변 인사가 시적 풍경이 되어 한 편의 시로 살아나기 마련이다. 남 시인의 시가 호흡이 짧고 내용이 명쾌하다는 것은 그 동안 시에 대한 내공이 많이 쌓였고 그 만큼 깊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자연이 사람의 삶일 수 있고 사람이 자연일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살맛나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이 시집을 읽으면..

독종

홍해리 시인 - 독종 / 비젼통신 포포 김영교 추천 2020.03.24. 1 세상에서 제일의 맛은 독이다. 물고기 가운데 맛이 가장 좋은 놈은 독이 있는 복어다. 2 가장 무서운 독종은 인간이다. 그들의 눈에 들지 마라. 아름답다고 그들이 눈독을 들이면 꽃은 시든다. 귀여운 새싹이 손을 타면 애잎은 손독이 올라 그냥 말라죽는다. 그들이 함부로덤부로 뱉어내는 말에도 독침이 있다. 침 발린 말에 넘어가지 마라. 말이 말벌도 되고 독화살이 되기도 한다. 3 아름다운 색깔의 버섯은 독버섯이고 단풍이 고운 옻나무에도 독이 있다. 곱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독종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하면서도 독종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라는 못된 종자이다. 4 인간은 왜 맛이 없는가? [홍해리 시인 약력] 충북 청주 출생(1942)..

시가 죽이지요

시가 죽이지요 홍 해 리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내 시가 죽이라니 영양가 높은 전복죽이란 말인가 시래기죽 아니면 피죽이란 말인가 무슨 죽이냐구 식은 죽 먹듯 읽어치울 만큼 하찮단 말인가 내 시가 뭘 죽인다는 말인가 닦달하지 마라 죽은 밍근한 불로 천천히 잘 저으면서 끓여야 제 맛을 낼 수 있지 벼락같이 쓴 시가 잘 쑨 죽맛을 내겠는가 죽은 서서히 끓여야 한다 뜸 들이는 동안 시나 읽을까 죽만 눈독들이고 있으면 죽이 밥이 될까 그렇다고 죽치고 앉아 있으면 죽이 되기는 할까 쓰는 일이나 쑤는 일이나 그게 그거일까 젓가락을 들고 죽을 먹으려 들다니 죽을 맛이지 죽 맛이 나겠는가 저 말의 엉덩이같은 죽사발 미끈 잘못 미끄러지면 파리 신세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사발이 되지 시를 쓴답시구 죽을 쑤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