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詩人들』1987~1999

<우이동 시인들> 제12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채희문

洪 海 里 2008. 7. 5. 18:39

<우이동 소리>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채희문

 

 시인의 숫자는 세계에 자랑할 만큼 많아도 시인의 이름으로 된

고장이나 거리 하나 제대로 없는(서울 남산 소월로 정도뿐) 이 나

라의 현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치가의 이름은 썩어도 문학·예술가의 이름은 썩지 않고 향기로

워야 한다는데, 그 썩을 이름을 위하여 광분하고 있는 문단 정치꾼

들의 한심한 작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문학인들의 권익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한다는 문학단체들

이 수도 없이 늘어나는데, 허구헌날 헐뜯고 싸우는 소리만 요란한

문단의 비문학적 행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시를 잘 쓰면 옛날처럼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출세길이 열리

는 것도 아닌데, 해마다 그 등용문을 향해 수천 명이 넘게 정면, 또

는 측면 돌파를 시도하는 지망생들의 증가율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참다운 詩作 을 위한, 진지하고 치열한 자기 연소의 고독한 아픔

과 그 고행의 과정도 없이 '원로·중진·중견'들을 찾아다니며 줄서기

에 급급한 詩壇 부정입학생들의 행렬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 중

에서도 무자질 '유한 문학마담'들의 치맛바람은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산지사방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시인들을 긁어모아 자기 사단이나

군단 조직편성에 여념이 없는 일부 유사종교 교주형 두목(?)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아무도 모를 말들을 적당히 얼버무려 놓고 낯뜨겁게도 꽤나 그럴

싸한 문제의 작품처럼 착각을 유도·강요하는 일부 사기꾼성 시인들

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무허가 직업소개소 같은 문학점포를 차려놓고 文壇行 티켓을 팔

고 있는 일부 奸商 모리배 같은 문인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별로 이렇다 할 만한 작품도 내놓은 게 없는 사람이 문학상을 타

고 있는 엄숙한 수상식장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런 류의 상일수

록 심심찮게 들려 오는 뒷얘기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눈부시게 장식한 정체 불명의 화

려한 시집들과 그 내용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잘못된 작품을 잘못 읽어서인지 옥석도 감정을 못 하고 잘못 써

내려간 일부 문학비평가들의 非評(?)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詩도 시인도 제대로 판별할 줄 모르면서 시류에 따라 흥미 위주

로 써갈기는 일부 문화면 기자의 황당한 기사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세칭 중진화가의 1호짜리의 그림 값과 그만한 지면의 詩고료와의

엄청난 차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느 방송작가의 수억 원대 전속계약금과 어느 가난한 시인의 시

집 자비 출판 비용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 옛날 문단 사랑방 같은 술집은 고사하고, 어쩌다 외상술에 한

저녁 출출한 가슴을 적실 만한 단골집 하나 틀 수 없는 각박한 요즘

의 도시 골목길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詩다운 시 하나 수록되지 않은 시집일수록 시집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으레 등장하는 문단명사들의 주례사(?)는 우리를 슬프게 한

다. 그런 시집에 발문형식으로 게재되는, 시보다도 엉뚱하고 난해한

長文의 글들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우이동 무공해 시집의 서두에까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쓰게끔 돼 버린 오늘의 문단현실과 그 공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산에서 길을 묻다』1992. 작가정신, 정가 2,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