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詩人들』1987~1999

<우이동 시인들> 제23집 '시는 삶일 뿐이다

洪 海 里 2008. 7. 8. 10:57

<우이동 시인들> 제23집『눈썹 끝 너의 그림자』

 (작가정신, 1998, 값 4,000원)

 


<우이동 소리>

 

시는 삶일 뿐이다

 

                                                洪 海 里

 

  시는 복숭아 꽃물 들인 그대의 새끼손가락 손톱 속에

내리는 첫눈이다.

 

  시는 희망이요 절망이다. 희망의 번개요 절망의 천둥

이다. 그리하여 조화요 혼돈이고 혼돈이면서 조화이다.

 

  시는 눈 내린 오솔길이다. 그 길 위에 찍혀 있는 한 사

람의 발자국에 고여 있는 순수한 고요이다.

 

  시는 울음이요 얼음이다. 웃음이요 차돌이다.

 

  시는 갓 창호지를 바른 지창이요, 그곳에 은은히 어

리는 따수운 저녁 불빛이요, 도란도란 들리는 영혼의

울림이다.

 

  시는 가슴에 내리던 비 그치고 멀리 눈밖으로 사라지

는 우렛소리이다.

 

  시는 실연의 유서이다. 말로 다 못하고 남겨 놓은 싸

늘한 삶의 기록이다.

 

  시는 흙이다. 검고 기름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흙의

가슴이다.

 

  시는 맑디맑은 눈빛이다. 핑그르르 도는 눈물이다.

그 눈물이 오랫동안 익고 익어서 빚어진 보석이다. 눈

물의 보석이다.

 

  시는 연잎이나 토란잎에 구르는 영롱한 물방울이거나

풀잎 끝에 맺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이슬방울이다.

 

  시는 화살이다. 막혀 있는 그대의 가슴에 피가 돌게

하는 금빛 화살이다.

 

  시는 푸른 소나무 바늘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다.

순수의 강물 위에 흐르는 맑은 바람이다.

 

  시는 만추에 피어나는 새싹의 파아란 볼이다. 늦가을

을 다시 봄이게 하는.

 

  시는 절집에 매달려 있는 뼈만 남은 물고기의 "잠을

깨라, 깨어 있어라!" 하는 뜨거운 외침이다.

 

  시는 잠속의 꿈이요 꿈속의 잠이다.

 

  시는 깊은 산속 솟아오르는 충만한 옹달샘물이다.

 

  시는 초록빛 춤을 추는 나무다. 그것은 이상과 휴식

과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준다.

 

  시는 기다림이요, 그리움이다, 사랑이다. 늘 차지 않

아 안타까운 빈 잔이다.

 

  시는 마지막 불꽃이다.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이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다 타버린 것까지 다시 태우는 불

꽃이다.

 

  시는 상상력의 증폭기이다. 순간과 영원을 함께하고

극락과 지옥을 같이한다.

 

  시는 사춘기의 꽃이다. 떨리는 가슴의 언어를 엮어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는 대행기관이다.

 

  시는 문학의 원자요 결정체이다. 모든 문자로 된 매

체는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나야 한다.

 

  시는 가장 정교하고 우아한 의상 전시장이다. 그 의

상을 입은 사람들은 스스로 빛이 난다.

 

  시는 집중이다, 중심이다.

 

  시는 첫눈이고 첫서리이고 첫얼음이다. 첫성에이다.

그리하여 첫사랑 같고 첫키스 같고 첫날밤 같아야

한다.

 

  시는 독주다. 사내들의 우울한 가슴을 태울 100%의

순도를 지닌 독주의 순수·투명함이다.

 

  시는 우리나라 비평가들의 밀가루 반죽이다.

 

  시는 정신의 건전지이다. 피로한 정신의 기력을 채워

주는 생명공학이다.

 

  시는 백담계곡의 맑고 찬물에 노니는 열목어의 붉은

눈빛이다.

 

  시는 언어의 사리이다. 자신을 태워 만드는 스스로의

사리이다. 

 

  시는 사랑이다. 항상 막막하고 그리웁고 안타깝고 비

어 있어 허전하고 늘 갈구하며 목말라 한다.

 

  시는 똥이다. 잘 썩어 우리들의 영혼의 자양분이 되

는 향기로운 똥이다.

 

  시는 미늘이다. 영혼의 탈출을 막는 날카로운 미늘

이다. 

 

  시는 다이아몬드이다. 사람이 사는 빈자리마다 푸르

게 빛나는 영롱한 보석이다.

 

  시는 새벽녘에 갓 잡아올린 신선한 생선이다. 그 금

빛 비늘이다.

 

  시는 삶이다. 삶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시는 삶일 뿐

이다.

 

(『눈썹 끝 너의 그림자』작가정신, 1998, 값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