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시집
『대추꽃 초록빛』(1987)
포기 연습 / 홍해리
한양대학 부속병원
905호실의 하얀 공간.
다 거두어 들인 들판
비끼어가는 가을햇살처럼
조금은 쓸쓸하고
담담하게
내가 둥둥 떠 있다.
녹색 수술복
금식 팻말.
하나씩 하나씩 비워내고
마지막 하나까지 비운 다음
눈 감고 실려가는 수술실은
머언 먼 우주의 별.
마침내
내가 나를 만날 때
여러 이름들이 떠올랐다
허공이 망막에 가득하고
어둠 속에 점이 한 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이 왔다
얼만가 세월이 흘러가고
회복실에서
내가 나를 다시 만났을 때
혓바닥까지도 숯검정이 되어
아무리 고갤 흔들어도 응답이 없었다.
회복실 서창에 타던
노을의 불바다
두 눈을 싸맨 나
방향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1986 봄 / 홍해리
영등포 로터리
김안과 병원
접수권 번호 4846
보이지 않는 눈을 감고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세상이 막막하다
간호원에 이끌려
의사 앞에 앉는
나는 수인
죄없는 수인이 된다
세상은 밝고
초롱초롱한 눈동자기 거리에 가득한데
눈을 가린 나는
갈 곳 없는 외로운 섬
등대불 꺼진 바다
바람은 불어왔다
어딘가로 또 사라져가고
어두운 낭떠러지
자꾸자구 갈앉는
까만 돌멩이
돌멩이의 까만 절망
쓸쓸하고
어둡고
춥다.
사랑 小曲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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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질간질 꿈질꿈질 둘레둘레 두근두근
망설망설 추근추근 힐끗힐끗 지분지분
소곤소곤 곰실곰실 조마조마 후들후들
토닥토닥 생긋생긋 끄덕끄덕 해작해작
후끈후끈 허청허청 아찔아찔 흐늘흐늘
꼬물꼬물 종알종알 꼬치꼬치 앙알앙알
너를 위하여 / 홍해리
독새풀 일어서는 논두렁 자운영꽃같은 여자,
잔디풀 잠깨는 길가 키 작은 오랑캐꽃같은 여자,
과수원 울타리 탱자꽃같은 여자,
유채꽃 밭머리 싸리꽃같은 여자,
눈 덮인 온실 속 난초꽃같은 여자,
칼바람 맞고 서 있는 매화꽃같은 여자,
산등성이 홀로 피어 있는 들국화같은 여자,
아지랑이같고 백지에 내리는 눈발같고,
그래서 반쯤 비어 있는 그런 너를 위하여.
시인詩人이여 / 홍해리
요즘 詩들은 시들하다 시들시들 자지러드는 한낮 호박잎의 흐느낌 마른 개울의 송사리 떼 겉으로 요란하고 울긋불긋 시끄럽다 비 맞은 보리밭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천둥 번개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미쳐 거리를 헤매는 이도 독주에 절어 세상을 잊는 이도 없다 아무도 없다 차라리 오늘밤엔 말뚝이를 만나야겠다 말뚝이 애인이라도 만나야겠다 무릎 꿇고 애걸복걸 형님, 형님! 술 한잔 잘 올리면서 시원하게 물꼬도 트고 새벽녘의 성처럼 일어서야겠다 그렇다 그렇다 시인만 하는 절벽같은 절망의 어둠을 지나 육두문자로 시원하고 신선하게 일어서야겠다 시인이여 시는 시시하고 시인은 그렇다!고 시인만 하는 어두운 골목을 지나 새벽녘 성처럼 일어서야겠다 시인이여 詩人이여!
매화梅花 / 홍해리
7.8월 매화는 임신 중
입덧을 하느라 잎이 말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빛도 말려
언 눈 속 이른봄 잔치는 잔치
삼복에 부른 배 기미가 피어
말린 잎 흔들다 잠이 든 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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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피면 / 홍해리
하늘을 열기 위해 우주를 삼킨 네 눈에 모은 빛으로.
이 겨울 우리의 빈혈을 다수웁게 덥히면.
은은히 들려오는 피리 소리 천상에서 내리고,
마주하고 나누는 넉넉한 달빛으로,
자기잔에 넘치는 마알간 술빛,
허기로 달래보는 이 계절의 위안이여!
선운사에서 / 홍해리
눈 내린 선운사 동백숲으로 동박새들 모여서 재재거리고 눈 위에 반짝이는 겨울 새소리 도솔암 오르는 길을 따라서 낭랑하게 선문답하는 개울 물소리 은빛으로 반짝반짝 몸을 재끼는 솔잎 사이 바람이 옷을 벗는다 암자엔 스님도 보이지 않고 풍경소리 홀로서 골을 울린다 온 세상이 눈에 덮이고 나니 이것이 사랑이란 생각이 든다 늦잠자던 색시들 동백장 색시들 봄에 오마 약속하고 떠나버린 잊혀진 듯 고요한 사하촌 하늘 종일토록 눈은 내려 산하를 덮고 텅 빈 적막 속에 잠든 겨울 꿈 깨앨까 마알까 하는 2월말 이따금 드나드는 찻소리까지 눈에 덮여 눈에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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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蘭 / 홍해리
이쁜 혓바닥 쏘옥 내밀고 돌아서는,
욕실을 나서는 기인 머리의 계집애.
도란도란 정답은 초가지붕
달빛 어리는 지창 안 연한 수묵빛
차마 풀지 못하는 포옹
말없이 가슴을 울리는 말씀 하나.
난꽃이 피면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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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아무도 가지 않은 눈 위를 가고 있는 사람 모든 길이 눈 속으로 사라지고 길이 없는 이승을 홀로서 가는 쓸쓸한, 쓸쓸한 등이 보인다.
Ⅱ 진초록 보석으로 날개를 달고 눈을 감고 눈을 뜬다 만 가지 시름이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가장 지순한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장산 비자림 딸깍다릴 지날 때에도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어 있었거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투명한 이른 봄날 이른 아침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女人의 中心 실한 무게의 男根이 하늘에 걸려 있다.
고추밭 / 홍해리
천하잡놈들이다 그놈들 행실머리라니 잘못 들어온 문도 닫지 않고 내닫는다 천지간에 물건을 내놓고 애놈들까지도 은화를 쩔렁대면서 덩달아 덜렁댄다 축 늘어져 있어도 빳빳하기는 독이 오를 대로 올랐다 하늘에 매달린 천사들의 남근이다 고구마 밭고랑에 앉아 오줌을 쏘는 잡년의 폭포소리 고구마가 쩌억 갈라지고 날아가던 새가 똥을 찍 갈겨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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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막기 / 홍해리
사는 일이 어차피 구멍이나 막는 일
여기저기서 터지는 구멍으로 쇳소리도 스며들고 꽃향기도 새어나간다
생활이란 싸늘한 구멍이야 어찌어찌 꾸려서 막는다지만 가슴에 난 구멍은 어쩔 수가 없다
구멍을 막읍시다 구멍 구멍!
신나게 설레면서 구멍 찾아 구멍 막기
있어야 할 곳엔 보이지 않고 있어선 안 될 곳만 찾아 존재하는 너의 자존
숨구멍 목구멍 콧구멍 귓구멍 O구멍 X구멍 쥐구멍 물구멍 바람구멍 구멍구멍 구멍탄!
뚫어진 구멍을 막기 위하여 구멍을 파고 김 빠진 맥주, 바람 빠진 고무풍선 같은 일상을 꿈으로 막는다 눈물의 꽃으로 가린다.
정읍사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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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내의 말
나라가 저자요 저자가 젖었으니 내 어찌 젖지 않을 수 있으랴 밝디 밝던 달빛 사라지고 어둔 길 홀로 돌아가네 한낱 꿈길이라는 인생살이 눈물나라일 뿐인가 떨어진 미투리 버선목의 때 가래톳이 서도록 헤매여도 술구기 한 두 잔에 정을 퍼주는 들병이의 살꽃 한 송이 꺾지 못하고 빈대 벼룩에 잠 못 이룰 제 주막집 흙벽마다 붉은 난초만 치네 풀어진 신들메 황토길 넘어가는 칼칼한 목 정 어리는 주모 방구리 인 통지기 아래품 해우채도 못 되는 등짐만 허우적이며 저자거리에 젖어 있는 나, 이제 돌아가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2.계집의 말
달 돋는 밤이 오면 산 위에 서네
고갯마루 목 빠지게 머리푼 달빛만이 천지에 가득하고
저자거리 아랫녘 장수 허방다리 허물어지던
당신의 그림자 중다버지 떠돌이 더펄더펄
밤이면 눈물로 젖고 낮이면 돌로 서네
가슴에 지는 꽃잎 새 되어 날아 젖은 날개 퍼덕일 때
당신 계신 젖은 나라 햇빛나라 금빛나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서동요薯童謠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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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의 아이들 입마다 불을 밝혀서
서라벌 고샅마다 밤을 밝히던
사랑 앞엔 국경도 총칼도 없어
오로지 타오르는 불꽃 있을 뿐
사랑도 그적이면 꽃이였어라.
2 사랑 앞에선 황금도 돌무더기 신라 천년 사랑 천년 그 언저리 노랫소리 들려요 들려요 그대 옆구리 간질이던 바람 아직도 가슴에 타고 서라벌 나무 이파리 하나 흔들리고 있어요 고샅마다 아롱아롱 일어나는 아지랑이 몽롱한 꿈자리 보여요 보여요.
3 6월이 오면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지만 시멘트 철근의 숲은 오염에 젖어 있고 흐린 하늘 아래 아래만 살아남은 뜨거운 사랑 순간접착제 뻥 튀긴 강정 불꽃만 요란하고 식은 잿더미가 골목마다 쌓인다 별이 뜨지 않는 매연의 거리 이제 사랑도 별볼일없어 찍어 바르고 문지르고 두드려 저마다 몇 개의 탈을 쓰고 거리마다 서성댄다 소리의 집만 무성한 잡초 덤불 깨어진 거울 조각이 시대의 흙 속에 묻힌다.
백결가百結歌 / 홍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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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천지간 소리란 소리 다 모아서 곡을 지으리라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는 누구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소리 하늘이 반주하고 산과 바다가 노래하는 곡을 엮으리라 가슴이 비어 있는 이 시대를 위하여.
2 떡을 치세 떡을 치세 쿠웅 따악 쿠웅 따악 떡을 치세 떡을 치세 이 떡을 쳐 누굴 주나 맘씨 고운 이웃들과 고루고루 나눠 먹세 해가 지고 바뀌어도 인정만은 변치 마세 있는 놈은 있는 대로 없는 놈은 없는 대로 변함없는 세상살이 그 누구를 원망하랴 금방아로 은방아로 있는 놈들 방아타령 요란한들 무엇하며 배고프고 괴로운들 이 내 팔자 별수없네 달을 따다 떡을 빚고 별을 따서 떡을 치세 바람 잡아 곡조 짓고 마주앉아 가난 타니 곡조마다 가슴 치네 집안 가득 동네 가득 나라 가득 하늘까지 해 저무는 길목에서 동터오는 고샅까지 가난이야 나랏님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아침부터 밤 늦도록 고운 소리 떡을 쳐도 입은 흉년 귀는 풍년 세상 인심 사나워도 거문고를 마주하면 부러울 것 하나 없네 이승이 곧 별천지라 한 자 한 자 각을 하듯 뜯어내는 맑은 곡조 떡을 치세 떡을 치세.
3 배 부른 귀에 들릴 리 없는 울리지 않는 곡조 가슴으로 뜯으면 세밑에서 오동나무가 운다 봉황이 울도록 여섯 줄 뼈 끝으로 튕겨도 하늘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 따끝이 멀어 들리지 않는다 아아 더 먼먼 사람의 나라 비어 있음을 위하여 이 가슴을 다 쏟아 내 영혼의 모음을 다 모아 곡을 지으리라 곡을 지으리라.
아내 / 홍해리
별, 꽃, 달, 풀, 강으로 된 한 편의 서정시이더니,
자식, 연탄, 세금, 건강, 걱정의 장편 통속소설이 되었다.
홍해리 시인
블로그/ http://blog.daum.net/hong1852
카페 / http:// cafe.daum.net/urisi | | * 최병무 님의 블로그(http://blog.daum.net/dongsan50)에서 올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