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짧은 시 읽기(『은자의 북』1992 / 『난초밭 일궈 놓고』1994)

洪 海 里 2010. 3. 23. 13:17

<짧은 시 읽기(『은자의 북』1992 / 『난초밭 일궈 놓고』1994)

 

 

백척간두 

 

사랑아 너는 속이 타는 걸
알 것 같다 했지,

시퍼런 칼날 위
깨어나는 빛으로 서는 걸.

                        - 시집『은자의 북』(1992)

 

 

시 한 편

 

난 속에
암자

암자 속에
비구니

비구니의
독경

독경의
푸른 
빛.

 

 

장미

 

빨갛게

소리치는



싸 · 늘 · 함.

 

 

세란헌洗蘭軒

 

하늘이 씻은 너를 내 다시 씻노니

내 몸에 끼는 덧없는 세월의 티끌

부질없이 헛되고 헛된 일이 어리석구나

동향마루 바람이 언뜻 눈썹에 차다.

 

*세란헌 : 우이동에서 난을 기르고 있는 달팽이집만한 마루임.

 

 

장미꽃

 

햇빛도 네게 오면 궁핍한 아우성

처음으로 얼굴 붉힌 알몸의 비상

끝내 너는 싸늘한 불꽃의 해일인가

빨갛게 목을 뽑는 서녘 하늘 저녁놀.

 

 

난초 이파리

 

부러질 듯 나부끼는 가는 허리에

천년 세월이 안개인 듯 감기고

있는 듯 없는 듯 번져 오는 초록빛 황홀

해 뜨고 달 지는 일 하염없어라.

 

 

 

하늘 지고 땅을 안고

무한 공간 서쪽으로

너를 찾아 울며불며

꽃잎 하나 입에 물고.

 

 

사랑

 

네 앞에 
서면

물컵에
떨어진

한 알
아스피린처럼

내가
있다

내가 
없다.

 

 

 

산벽에 마주앉아

 

 

먼지 알갱이 하나 쪼개고 쪼갠 다음

그 속에 집채만한 굴 하나 파고

겨우내 들어앉아 면벽, 면벽하노니

천지가 몸 속으로 들어와 하나 되누나.

 

 

시치詩痴

 

가을이 와도 내 나뭇가지에 열매 하나 없네
달덩이 같은 시 한 알 맺지 못하고
푸른 하늘만 바라보며 손 흔들고 서서
몸바꾸는 산천초목에 마음 뺏기는
나는 시치, 못난 시치일 수밖에야
가을이 와도 시 한 알 맺지 못하는.

                   - 시집『난초밭 일궈 놓고』(1994)

 

 

참꽃여자 · 1

 

하늘까지 분홍물 질펀히 들여 놓는
닿으면 녹을 듯한
입술뿐인
그 女子.

 

 

난초밭 일궈 놓고

 

 

백운대 바위 아래 한 뼘 땅을 갈아엎고

몇 그루 난을 세워 바람소리 일으키니

그 바람 북으로 울다 피리소리 토해내고

푸른 칼날 번쩍이며 달빛 모아 춤을 엮네.

 

 

5월이 오거든

 

날선 비수 한 자루 가슴에 품어라

미처 날숨 못 토하는 산것 있거든

명줄 틔워 일어나 하늘 밝히게

무딘 칼이라도 하나 가슴에 품어라.

 

 

 

오동도

 

동백꽃에 동박새

꽃 속에 꽃술

꿀 빨며 꿈에 취한

동박새 부부.

 

 

* 1990년대 초부터의 짧은 시 몇 편을 골라 보면서 20여년 전의 나를 만나는 기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지나간 추억은 다 그립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추억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는 난을 찾아 남도 해안과 섬을 싸돌아 다니던 한때가 지난 다음의 시절이다.

차분해져야 할 나이에도 늘 들떠서 산 듯하다.

그러니 시도 그렇게 나올 수밖에야!

                     - 洪 海 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