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스크랩] 임보 시인 그는 누구인가 (1) / 홍해리 시인

洪 海 里 2011. 6. 29. 06:18

              임보 시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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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해리 시인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한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두렵고 막막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내가 임보 시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머릿속이 갑자기 텅 비는 느낌이다.

임보 시인은 누구인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는 지금 몇 시인가?

“너, 임보! 참 미련ㅎ고 겁 많은 녀석! 한때는 천재이기를 바라고 시작했던 네 유년의 시,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게으른 둔재인 것을---. 열다섯 해 동안 끈질기게 써 모은 작품이란 것이 겨우 30여 편, 너, 임보! 지독히 형편없는 친구야!” 이것은 1974년에 나온 그의 첫 시집 『林步의 詩들 59 · 74』의 서문에서 앞부분을 인용한 것이다.(단, 한자는 한글로 바꿨음). 「다시 임보에게」라는 이 서문에 30여 편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31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본인의 말대로 많지 않은 작품이다. 한 해에 두 편씩 썼다면 과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과작 가운데도 태작이 있고 다작 가운데도 명작이 있겠지만 그는 이런 과작의 세월을 건너 다작의 바다에 이르렀다.

임보! 그에게는 프랑스의 조숙한 천재시인 랭보(J. A. Rimbaud, 1854-1891)에 심취했던 문학소년 시절이 있었다. 그를 얼마나 좋아하고 깊이 빠졌으면 강홍기(姜洪基)란 본명을 두고 임보(林步)라는 필명을 쓰게 되었겠는가. 숲 속을 걷는 시인, 느릿느릿 숲길을 산책하며 사색에 젖기도 하고 시상에 잠기기도 하는 시인, 그래서 임보는 한국의 랭보가 된 것이다.

내가 돈암동에 있는 여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70년대 말의 어느 봄날이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귀엽고 예쁘게 생긴 단발머리 소녀가 팔랑팔랑 내게로 날아왔다. 그때 2학년 어느 반의 반장이었던 그녀는 내가 시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 아버지 시집이에요” 하면서 내민 것은 하드카버로 장정된 『林步의 詩들 59 · 74』였다.

명찰의 이름은 ‘강우원진’인데 ‘임보’가 아버지라니 나는 어리둥절할 밖에! 이렇게 해서 나는 임보 시인과 이어지게 되었다. 우이동의 두 개의 섬을 엮어준 것은 바로 임보 시인의 큰딸이었던 것이다. ‘강홍기’의 딸 이름이 ‘강우원진’이라! ‘姜宇‘는 임보 시인이 시조로 탄생시킨 새로운 성씨이다. 두 딸과 두 아들의 이름을 모두 ’강우‘ 다음에 두 글자로 지었는데 빨리 읽으면 성명이 세 자로 읽히게 되어 있다. ’강우원진‘을 빨리 발음해 보면 ’강원진‘으로 읽히지 않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80년대 우이동에는 많은 시인들이 살고 있었다. 하나같이 북한산에 발목을 잡혀 떠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큰 소리로 소리쳐 부르면 들릴 만한 거리에 살고 있던 이생진, 임보, 채희문 시인과 나는 86년 <우이동시인들>이란 동인을 결성하게 되어 ‘우이동 4인방’이 탄생하게 된다. 이듬해 동인지『우이동』제1집을 펴내고 그 기념으로 덕성여대 입구에 있는 파인웨이라는 카페에서 제1회 시낭송회를 열었다. 87년 5월의 일이었다. 해마다 봄가을로 동인지를 펴내면서 시낭송회를 열어온 것이 <우이시낭송회>로 발전하여 이제 232회를 넘겼고 ‘우이동’ 동인지는 25집까지 낸 후 월간『우이시』와 시낭송회를 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해 잠정적으로 쉬게 되었다. 월간『牛耳詩』는 금년 1월부터『우리詩』로 개제하고 ‘우이시낭송회’도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북한산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아 복숭아나무를 수십 그루 심고 가꾸어 ‘우이도원(牛耳桃源)’을 조성하고 만산에 백화가 난만한 봄에는 <삼각산詩花祭>를, 단풍이 불타는 가을에는 <삼각산丹楓詩祭>를 이곳에서 올리고 있다. 이 모든 일의 앞과 뒤에는 늘 임보 시인이 있어 방향타를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이제까지 펴낸 시집을 살펴보면 그는 지상에 있으면서도 천상에 있고 현실세계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가 하면 상상세계 속을 날개도 없이 날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현재이면서 과거이고 미래인 시간을 살고 있다.

그는 코끼리요 나는 장님이다. 그러니 내가 쓰는 이 글이 읽을 만한 꺼리가 되겠는가. 그는 30년이 훨씬 넘는 긴 세월을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 자락의 한 집에서 살고 있는 주변머리 없는 천생시인이다. 남들 같으면 강남으로 이사를 갔어도 몇 번은 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집이 벌어준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금쯤 아방궁 같은 토끼장이나 닭장에서 살고 있을 텐데! 그러나 그는 하늘을 간질이는 높고 복잡한 건물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이사를 가지 않는 이유는 앞마당에 곧게 자란 잣나무를 안고 갈 재간도 없고 뒷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인수 백운 만경을 떠메고 갈 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철마다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북한산의 아름다운 자연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늘 자연과 하나 되는 우이동 생활을 어이 멀리 할 수 있단 말인가. 매실주 한잔 걸치고 숲 속에 들면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타고 노는데 이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1974년에 첫 시집을 낸 후 그는 오랫동안 시와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시집이 나온 것이 84년이니 10년이란 짧지 않은 공백이 그의 시를 속으로 살지게 했던가 보다. 그의 시는 읽는 재미가 있다. 그냥 술술 읽힌다. 그의 시 속에는 이야기가 있다. 읽으면서 가슴속으로 찌르르 흐르는 감동의 전파가 일게 한다.

그는 산방에서 혼자 동동거리기도 하고(『山房動動』) 목마를 만들어 타고 다니면서 일기를 적기도 했다(『木馬日記』). 또한 한때는 은수달을 잡으러 섬으로 나다니기도 하지 않았던가(『은수달 사냥』). 그런가 하면 황소의 뿔을 잡고 겨루기도 하고(『황소의 뿔』) 한겨울 호수에 앉아 있다 얼어붙은 호수를 안고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며(『날아가는 은빛 연못』) 하늘소의 춤을 추기도 했다(『겨울, 하늘소의 춤』).

그러다 그는 마침내 구름 위에 다락마을을 꾸며놓고 순하고 숫된 촌장이 되었다(『구름 위의 다락마을』). 구름 위에서 놀다 보니 지상의 부처가 그리웠던지 하나하나 그리고 깎아낸 것이『운주천불』이요,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하고 묻다 보니『자연학교』를 설립하고 종신 교장이 되어 마침내『장닭 설법』을 하게 되었다. 그는 왜 장닭으로 하여금 설법을 하게 했을까? 오늘날 혼탁한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무지막지한 인간들에게 시원한 설법을 들려주고자 하는 것일까? 세상이 모두 알도 낳지 못하는 불임의 암탉은 아닐까? 우리 모두 꽁지 빠진 닭처럼 엉거주춤 서서 장닭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은 아닐까?

이제 그는 인간과 우주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들어 구도자적인 자세로 달관의 상태에서 삶의 본질을 천착하면서 세상에 시를 조용조용 그러나 때로는 버럭버럭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수탉‘이라 하지 않고 ’장닭‘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발음 때문일까. ’장닭‘을 잘못 보면 ’닭장‘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이러니 겨우 지상에 방 한 칸을 빌어 살고 있는 내 주제에 임보 시인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이 숲 속 바위벼랑 깊은 암자에

감로주를 즐기는 키 작은 도사

지필묵 곁에 두고 종일 앉아서

심장을 꺼내들고 종일 앉아서

흥얼흥얼 시 한 수 읊조리다가

약수 한 대접 벌컥벌컥 들이켜고

진달래꽃 찾아서 산을 오른다.

- 홍해리 시,「임보」전문

 

그는 술을 즐긴다. 식사 때마다 매실주를 빼놓지 않는다. 주초에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 준 맛있는 안주를 차에 가득 싣고 청주에 있는 허공중의 섬으로 내려갔다 안주가 다 떨어지는 주중이면 우이동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꽤 오래 되었다. 그런데 이 술은 90 넘은 장모가 해마다 몇 동이씩 만들어 보내주는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시를 쓴다는 이가 술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 좀 이상한 듯이 보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 부담 없이 한잔 하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환하고 풍요롭게 보이는가.

80년대 중반 ‘우이동 4인방’이 2, 3일이 멀다고 자주 만나 술과 시에 대한 담론을 뜨겁게 펼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늘 한 집에서만 만나다 보니 그 집 상호 아래 <우이동 시인들의 집>이란 간판이 내걸리게까지 되었다. 멋진 술집이 얼마나 많은데 한 집만을 고집했을까. 좀은 어리뜩한 4인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집이 번쩍번쩍하는 화려한 모텔로 변신했고 우리는 보금자리를 잃고 말았지만 그곳에서의 역사는 바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몇 해 전 남해의 어느 섬에 가서 소나무 우거진 어부림을 곁에 두고 비가 쏟아지는 속에서 출렁이는 물 위에 배를 띄우고 그와 하루 종일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금방 잡은 물고기를 안주로 했으니 취할 리가 있었겠는가.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지금도 전설처럼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술은 우리의 상상력을 증폭시켜 주는 매개체가 아닌가. 위의 시에서처럼 그는 지금도 시와 글씨와 그림에 빠져 살고 있다. 오랫동안 갈고 닦은 시서화가 이제는 수준급이 되어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을 지경이니 가히 삼절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남도의 타고난 가락이 그의 몸에 절어 있어 단가나 적벽가 한 자락은 능히 뽑아대니 주석에선 늘 그가 상좌일 수밖에 없다.

‘우이동 4인방’이 그를 시로 표현한 것을 한번 살펴보면 임보 시인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으리라. 앞에서 말한 <우이동시인들>이 펴낸 동인지의 한 가지 특징은 ‘합작시(合作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합작시란 가장 우이동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네 사람이 한 편의 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앞의 사람이 한 연을 써서 다음 사람에게 주면 그것을 가지고 기승전결을 이루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우이동 시인들’이란 주제로 쓴 시를 보면 임보 시인은 다른 시인들과 자신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이생진 시인은 城山浦의 물소 / 채희문 시인은 包川의 황소 / 홍해리 시인은 淸原의 들소”라 해 놓고 자신은 “華山의 하찮은 염소”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인품의 한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인들이 임보를 묘사한 내용을 보면,

 

임보는 구름 위에 앉아 마술부채로 시를 빚는 詩道士 (채희문)

‘시인은 북이다. 쓰고 싶은 놈은 다 써라’ 소리치며 숲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생진)

임보는 일경구화(一莖九華), 백운대 청상한 바람소리로 향을 날리는 (홍해리)

 

이 속에도 임보 시인의 한 단면은 드러나 있지 않은가. 그가 보이고 그의 시세계가 슬몃 보이지 않는가.

 

이제 주마간산으로 그의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10여 년 전에 쓴 합작시 「운수재」를 인용하면서 끝내고자 한다. 운수재는 그가 살고 있는 집이다. 늘 삼각산에서 불어오는 삽상한 바람이 마당 이곳저곳에 놓여 잇는 수석과 함께 놀고 있는 곳이다. 이제까지 해왔듯이 부디 임보답기를, 임보스럽기를 바라고 싶다.

 

 

운수재(韻壽齋)

 

운수재는 우이동 덕성여대 앞에 있는

아담하고 분위기 있는 2층 양옥

그 집엔 시를 잘도 빚어내는

詩仙 임보가 살고 있어, 詩書畵는 물론

술과 노랫가락도 끊일 날이 없는데,

 

남창을 열면 잣나무들 하늘 홀리고

그 곁엔 대 매화 대추나무 귀재고 섰다

고것들이 북한산 바람소리 몰아다

풍악을 울리면 향기로운 기운이 돌아

꺼이꺼이 춤을 추는 맨발의 詩心아.

 

<韻>은 구름과 통하는 말

구름엔 소리가 없지만 마음이 울리는 거

<壽>는 끊이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라

구름雲과 물水이 흐르는 곳에 숲林이 있고

그 숲길을 걸어가는 임보

여기에 술과 시가 함께하니 가는 곳마다 韻壽齋일세.

 

풋고추 날된장에 梅實酒 말술

壽石 松竹 文房四友 짊어지고

三角山 바라보며 스무 해를 기다리네

어느 제 큰 가락 뽑아 仁壽峯을 오르리.

 

* 이 합작시는 임보 시인의 집을 그려 보았다 작품에 나타난 그대로다.

  순서는 채희문, 홍해리, 이생진에 이어 임보 시인이 마무리를 했다.(우이동 제20집『가슴속에 피는 꽃』1996)

  (계간『시와시학』68호. 2007 겨울호)

 

 

민문자 실버넷문화예술관장 mjmin7@silvernetnews.com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민문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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