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정곡론正鵠論』(2020)

<시> 우물 또는 샘

洪 海 里 2013. 3. 9. 00:14

우물 또는 샘

 

洪 海 里

 

 

샘은 몸이라곤 오직 속뿐이라서

안에 안고 있는 것이 물뿐이어서

물로 속을 칠 수밖에 없다

일년에 몇 번 벗을 것도 없는 몸을 씻으려면

물을 품고 물로 속을 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속이 썩어 속물이 되니

무른 물로 안을 품으면서 치고

속을 치면서 품어내는 것이다

샘은 몸이 하늘이고 바다다

샘을 품는 날이면

부정탄 것 없는 사내들이 모여

우물을 쳤다

물은 아래로아래로 흘러가지만

샘에서는 위로위로 솟는 것이 제 일이라서

물은 끊임없이 몸을 세우는 것을 제일로 친다

샘은 하늘의 소리를 듣는 귀와

말없이 대답하는 입을 가졌다

샘은 가장 위대한 어미라서

두레박이 오르내릴 때마다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을 하나씩, 하나씩

두레박에 몰래 담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샘을 품고 우물을 치듯

우리도 가끔은 몸을 치고 품어

우주를 가슴속에 안고 기를 일이다

넘치는 법이 없는 우물 또는 샘처럼.

 

      - 계간《예술가》2013.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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