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치매행致梅行』(2015)

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

洪 海 里 2014. 2. 5. 04:21

다저녁때

- 매행  ·  1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 월간《우리詩》2014. 4월호

 

*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무념무상의 세계의 순진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

이 글「치매행致梅行」은 수많은 치매환자를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결코 치사찬란恥事燦爛한 일이 아니다.  - 隱山蘭丁

 

 

 

* 치매를 넘어선 치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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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란헌(홍해리 시인님 댁, 택호)에 가면 매화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시인의 집은 지금 매화가 한창이다.
홍매, 백매, 청매, 치매!
시인은 癡呆를 致梅라고 부르며 가여운 삶을 시로써 노래한다.
그리하여, 세란헌엔 매일 매화가 핀다.
사시사철 피어나는 매화는 눈물 반, 웃음 반, 슬픔 반, 기쁨 반이다.
때로는 향기가 진하여 온 집안을 뒤덮기도 하도 때로는 무향으로 피어 가슴을 짓누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길이 치매행이 아닐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모든 것을 잊는 것,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새롭게 피우는 것!
오늘도 수십 년 동안 가슴에 망울졌던 꽃들이 일제히 그 꽃망울을 펑펑 터트린다.
그야말로 치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