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매화에 이르는 길』(2017)

들녘 - 치매행致梅行 · 174

洪 海 里 2015. 10. 15. 04:53

들녘

- 치매행致梅行 · 174

 

洪 海 里

 

 

 

가을걷이 다 끝나고 나면

나는 가을 거지가 됩니다

불 꺼진 빈집에는

침묵의 울음이 찬바람에 사그라들고

길었던 기다림을 털어 버린

영혼의 눈썹 한 올 한 올 위로 눈이 내립니다

마지막 한 톨까지 새들에게 다 주고 난

빈 들녘이 마침내 가득해집니다

봐야 보이고 들어야 들리는

한세상 사는 일이 한줌 바람이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깨어, 나는

날개 속에 부리를 묻고 밤을 지새는

철새들같이

이제 망각의 긴 겨울잠에 들어

윤슬처럼 반짝이며 오는 봄을 꿈꾸고 싶어

영영 깨지 않을 잠속으로 들어갑니다.

 

- 계간《한국시학》(2016. 가을호)

 

  자아란 무엇일까? 프로이드는 자아를 Id의 일부분이 외부세계에 접근하여

그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아 점차로 변한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자아는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수시로 변하고 이 변화를 통해서 개성으로 흡수되는 이름이

될 것 같다. 시인이 쓰는 시 또한 변하는 의식의 줄기를 포착하여 새롭게 변화를

주는 이유가 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정된 이미지를 빌려 쓰는 방법이 아니라

부수고 다시 재건축함으로써 신선함을 유발하는 일이 곧 시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가 길항拮抗에의 줄기찬 대결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는 신선한 말의

성찬이 독자의 심금을 자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사고를 특수한

이미지로 바꾸는 일은 시인이란 이름에 부여된 책무가 될 것이 중요하다.

일상적이고 흔한 말도 시인의 의도에 비틀어지고 왜곡의 빛을 쪼여주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된다.


  이른바 난치의 병인 치매癡呆- 살아가는 데서 자기의 의지, 기억, 지능이 상실되어

사회생활의 상실을 가져 온 병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추억을 모조리 파묻어

버리거나 왜곡의 생태- 비극적인 단절 앞에 망연한 생각의 돌파구가 꽃- 매화에

이르는 길을 연상하는 발상은 아름답다. 물론 이 발상의 이면에는 처절한 비극적

인식이 함께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비극의 함정에 빠지는 것보다 따스한 봄날의

매화향으로 상승하는 이미지의 역할은 비극을 상쇄하는 바- 인식의 탈출이 주는

시인의 에스프리가 놀랍다. 왜냐하면 질축거리는 비극에서 향기와 꽃으로 인식을

전환하는데 불치의 병은 오히려 아름다운 의상을 걸친 변화가 주는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서 어머니를 '자기를 낳은 여자'라 부르고 물은 '수소와 산소의 2대 1의

화합물'이라 설명된다.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사전의 설명인가. 고향 또한 '태어

나서 자란 곳'이라는 삭막한 설명과는 달리 어머니는 포근하고 따스함을 주는

뉘앙스는 이미 시적인 훈습薰習을 통해 뇌리에 전달되는 따스한 가슴의 언어가

곧 시적인 뉘앙스가 된다. 왜냐하면 고향이나 어머니니, 그리고 물이라는 사전적인

설명은 가장 과학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과 시적인 차이의 간격에는 맛깔이 없다는

점에서 삶은 시적일 때 여유와 감동의 생활이 전개된다. 언어의 버림에서 언어를

얻고 언어의 목줄을 쥐고 혁명을 꿈꾸는 비상식의 혁명가가 곧 시인이기 때문에

매화가 치매로 둔갑하는 일은 일상의 인식을 시적으로 환치하는 방법이다.

                             - 채 수 영( 시인)



* http://blog.daum.net/jib17에서 옮김. "나의 들녘도 이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