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 치매행致梅行 · 267
洪 海 里
주변에서, 이제 그만,
아내를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
곁에 있어 주는 것도 감사한 일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견뎌내고
가는 데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 사람들은 이제 그만 아내를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위에서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손을 놓으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견디고, 참고, 버티겠다는 선언적 발언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 한 행의 문장은 누가 누구에게 들으라고, 혹은 들려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롯이 한 시인의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달고 사는 “미안합니다!”. 그 상흔은 세월이 흘러서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시인의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상처입니다. 그렇게 시인은 아픈 아내를 말없이 쓰다듬고 바라봅니다. 그렇게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속죄양의 화자는 눈물젖은 불꽃으로 다짐을 합니다.
- 손현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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