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류
홍해리
날 선 비수 같은 달빛이
눈꽃 핀 댓잎 위에 내려앉았다
달빛에 놀라 쏟아져 내리는 은싸라기
그날 밤 대나무는 숨을 놓았다
목숨 떠난 이파리는 바람에 떨고
대나무는 바람神을 맞아들여
텅 빈 가슴속에 소리집을 짓는다
그렇게 몇 번의 겨울이 가고 나면
대나무는 마디마디 시린 한恨을 품어
줄줄이 소리 가락을 푸르게 풀어낸다
때로는 피리니 대금이니 이름하니
제 소리를 어쩌지 못해 대나무는
막힌 구멍을 풀어줄 때마다
실실이 푸른 한을 한 가닥씩 뿜어낸다
사람들은 마침내 바람 흘러가는 소리를
귀에 담아 풍류風流라 일컫는다.
- 시집 『비밀』, 우리글, 2010
내가 내는 소리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숨을 놓고 지난 생각까지 다 말리는 것일 텐데, 한동안 푸르던 이파리의 환상을 놓지 못했다. 마디마디 막혔다가 겨우 일어나는 소리는 거칠었다. 몇 번 계절이 돌고, 어지간히 속을 비우고 바람 들고나는 상처를 내고도 풍류로 이름 짓지 못했다. 헛바람이 너무 많다.
소리집을 지은 몸이 그렇다. 내 공간에 무엇이 다녀가도록 텅 비워놓는 일. 그리운 마음까지도 쌓지 않고 철저하게 빈속이 되는 일이다. 나는 내 몸에 간절하게 입김을 불어 넣은 적 있는가. 정성들여 속을 다독거린 다음에야 바람이 화답하여 몸을 훑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합주가 된다. 문득 이 일을 생각하니 마디마디가 다 소중하다.
출처 : 금강하구사람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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