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詩作
- 치매행致梅行 · 233
홍해리
집어등만 밝히면
물고기 떼로 몰려와
그냥 퍼내면 되는 줄 알았지만
밤새도록 불빛만 희롱,
희롱하다 돌아간 자리
눈먼 고기 한 마리 없는
한평생이란
텅 빈 백지 한 장
구겨지고 찢어져
바람에 날리고 있네.
-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도서출판 움, 2018
언제부터 이 시작詩作을 시작한 것일까. 내 시의 이력을 돌아보면 시작은 어둠 속 은밀한 동태라. 그 진행을 다 밝혀 전할 수 없고 다만, 연필을 든 순간에 문득 시가 써진 건 아니라는 말을 우선 놓는다. 내 방에는 글자로 채우지 않은 말이 허기를 안고 잔다.
말하자면 등 돌리고 어둠에 묻힌 사람의 빈껍데기 같은 몸을 재우던 날은 틀림없이 뒤척거리던 꿈자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깨어보면 말하지 못한 말이 옆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함께 어둠 한 덩이 굴리던 꿈의 부스러기가 늘 눈에 밟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신봉하던 작법作法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찬란한 언어로 채우고 싶던 백지는 “바람에 날리고” 스스로 눈먼 물고기로 산다. 눈먼 물고기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법을 안다. “텅 빈 백지 한 장”에 점 하나 찍어주려고 당신이 어둠을 안고 누워 있다.
- 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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