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와 한란(1)

洪 海 里 2019. 11. 30. 19:28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와 한란




11월도 다 흘러가고 있다.

오늘도 결혼식 피로연 두 군데 다녀오고 나니

한 달의 마지막 날 30일이 간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대는 느낌이다.

 

얼른 눈에 띄는

홍해리 시선집을 꺼내

洪海里가 어디 있는지 찾아나 볼까.


올해는 한란전시회도 못 가고

한라수목원 난실도 못 찾았는데

꽃 피는 시기는 지나가버렸다.

 

할 수 없이

전에 찍어둔 사진이라도

올려야겠다.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가을 엽서

 

풀잎에 한 자 적어

벌레소리에 실어 보냅니다

 

난초 꽃대가 한 자나 솟았습니다

벌써 새끼들이 눈을 뜨는

소리, 향기로 들립니다

 

녀석들의 인사를 눈으로 듣고

밖에 나서면

그믐달이 접시처럼 떠 있습니다

 

누가

접시에 입을 대고

피리 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달빛을 맞은

지상의 벌레들도

밤을 도와 은실을 잣고 있습니다

 

별빛도 올올이 내려

풀잎에 눈을 씻고

이슬 속으로 들어갑니다

 

더 큰 빛을 만나기 위해

잠시,

고요 속에 몸을 뉩니다

 

오늘도

묵언 수행 중이오니

답신 주지 마십시오.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다시 가을에 서서


 

샐비어 활활 타는 길가 주막에

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다

불길 담담한 저녁 노을을

유리컵에 담고 있는 주모는

루비 영롱한 스칼릿 세이지빛

반짝이는 혀를 수없이 뱉고 있다

그미의 손톱이 튀어나와

어둠이 되고 파도가 되고 있다

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석류꽃처럼 피던

그미의 은빛 넋두리가

드디어 하늘을 날고 있다

이슬을 쫓는 저녁 연기도

저문 산천의 으스름으로 섞여

꽃잎은 천의 바다를 눈썹에 이고

서른하나의 파도

허허한 내 오전의 미련을

부르르 부르르 경련을 하게 한다.

 

      -화사기花史記(1975, 시문학사)

    

 

 

참나무 그늘

 

그가 단상에 앉아 있을 때

마치 한 권의 두꺼운 책처럼 보였다 한다

한평생 시만 덖고 닦다 보니

육신 한 장 한 장이 책으로 엮였는지도 모른다

한마디 말씀마다 고졸한 영혼의 사리여서

듣는 이들 모두가 귀먹었다 한다

자신이 쓴 시를 스스로 풀어내자

강당 안은 문자향文字香으로 그득했거니와

몸이 뿜어내는 서권기書卷氣로 저녁까지 환했다 한다

평생을 시로 살았다면

말씀마다 꽃이 피고 새가 울어야 한다

그는 평생 모래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온 낙타였다

길고 허연 눈썹 위에는 수평선이 걸려 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달빛처럼 흘렀다 한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잠시 눈을 감자

먼지 한 알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울 듯 요란했다

다시 입을 열어 말을 마쳤을 때

방안에는 오색영롱한 구름이 청중 사이로 번졌다고 한다

그의 시는 오래된 참나무 그늘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지친 걸음을 쉬고 있었다

주변에는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한다

 

            -독종(2012, 북인)

 

    


첫눈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부는지

그 소리 가락 따라

앞뒷산이 무너지고

푸른빛 하늘까지 흔들면서

처음으로 처녀를 처리하고 있느니

캄캄한 목소리에 눌린 자들아

민주주의 같은 처녀의 하얀 눈물

그 설레는 꽃이파리들이 모여

뼛속까지 하얀 꽃이 피었다

울음소리도 다 잠든

제일 곱고 고운 꽃밭 한가운데

텅 비어 비어 있는 자리의 사내들아

가슴속 헐고 병든 마음 다 버리고

눈 뜨고 눈먼 자들아

눈썹 위에 풀풀풀 내리는 꽃비 속에

젖빛 하늘 한 자락을 차게 안아라

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

살아생전의 모든 죄란 죄

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

머릿결 곱게 날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

사랑이여 사랑이여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

온 세상을 무너뜨려서

거대한 빛

그 무지無地한 손으로

언뜻

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화사기花史記(1975, 시문학사)

 

           *홍해리 시선집洪海里는 어디 있는가(도서출판 움, 2019)에서

           *사진 : 한라수목원 '난실'의 한란



* http://blog.daum.net/jib17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