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새
사자 떼 은빛 갈기
산신령의 흰 눈썹
새들은 날아가다 눈을 씻고 보고
바람도 이를 드러내 허옇게 웃고.
♧ 용담꽃
떠나가도 눈에 선히 밟히는 사람아
돌아와 서성이는 텅 빈 안마당에
스산히 마른 가슴만 홀로 서걱이는데
소리치며 달리던 초록빛 바람하며
이제와 불꽃 육신 스스로 태우는 산천
서리하늘 찬바람에 기러기 떠도
입 꼭꼭 다물고 떠나버린 사람아
달빛에 젖은 몸이 허기가 져서
너울너울 천지간에 흐늑이는데
잔칫집 불빛처럼 화안히 피어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하리라’*
떠나가도 눈에 선히 밟히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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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의 꽃말
♧ 갯쑥부쟁이
눈 속에서도 자주꽃을 피우고
땅에 바짝 엎드려 있던
계집애, 잊었구나, 했더니
아직 살아있었구나, 너
이 나라 남쪽 바다 우도牛島 기슭에.
♧ 금강초롱
1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2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 층꽃풀탑
탑을 쌓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나무도 간절하면 몸이 흔들려
한 층 한 층 탑사塔寺를 짓는다.
층꽃나무를 보라,
온몸으로 꽃을 피워 올리는
저 눈물겨운 전신공양.
해마다 쌓고 또 허물면서
제자리에서 천년이 간다.
나비가 날아와 몸으로 한 층 쌓고
벌이 와서 또 한 층 얹는다.
스님은 어디 가셨는지
달빛 선정禪定에 든 적멸의 탑,
말씀도 없고 문자도 없는
무자천서無字天書 경전 한 채.
♧ 갈대
올 때 되면 올 데로 오고
갈 때 되면 갈 데로 가는
철새들이 오는 걸 미리 알고
무리 지은 갈대는 꽃을 피워
하늘을 향해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저 새들이 날갯짓이
갈대를 따뜻하게 했으니
갈대는 스스로 몸을 꺾어
날갯죽지에 부리를 묻고 밤을 지새는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강물은 새들의 시린 꿈이 안쓰러워
소리죽여 울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깊은 밤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이여
바람소리에 흔들리지 마라
허기진 네 영혼이 이 밤을 도와
강물 따라 등불 밝힌 마을에 닿을 때면
잠든 새들을 지켜 주던 별들은
충혈된 눈을 이슬로 닦으며 스러지고
갈대는 사내처럼 떠나버린 새들이 그리워
또 한 해를 기다리는 것이다.
*홍해리 꽃시집 『금강초롱』(우리詩 시인선 030, 도서출판 움, 2013.)에서
* http://blog.daum.net/jib17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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