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시가 죽이지요

洪 海 里 2022. 12. 9. 07:04

시가 죽이지요

 

홍 해 리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내 시가 죽이라니

영양가 높은 전복죽이란 말인가

시래기죽 아니면 피죽이란 말인가

무슨 죽이냐구

식은 죽 먹듯 읽어치울 만큼 하찮단 말인가

내 시가 뭘 죽인다는 말인가

닦달하지 마라

죽은 밍근한 불로 천천히 잘 저으면서 끓여야

제 맛을 낼 수 있지

벼락같이 쓴 시가 잘 쑨 죽맛을 내겠는가

죽은 서서히 끓여야 한다

뜸 들이는 동안

시나 읽을까

죽만 눈독들이고 있으면

죽이 밥이 될까

그렇다고 죽치고 앉아 있으면

죽이 되기는 할까

쓰는 일이나 쑤는 일이나 그게 그거일까

젓가락을 들고 죽을 먹으려 들다니

죽을 맛이지 죽 맛이 나겠는가

저 말의 엉덩이같은 죽사발

미끈 잘못 미끄러지면 파리 신세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사발이 되지

시를 쓴답시구 죽을 쑤고 있는 나

정말 시가 죽이 되어 나를 죽이는구나

쌀과 물이 살과 뼈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맛있는 죽이듯

네 시를 부드럽고 기름지게 끓이거라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 어느 해인가 늙은 호박을 열 몇 개쯤  누가 갖다 주어서 겨우내 호박죽을 쑨 적이 있다.

호박죽을 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공정이 꽤 많고 까다로운 까닭이다.

우선 껍질을 벗기는 게 힘들고 속을 다 긁어내야 하며  쑤는 시간 자체가 지루하다.

게다가 중간중간 끓는 죽이 튀어올라 손등을 데어 조심조심해야 한다.

죽 쑤는 일도 이렇게 만만치 않은데 하물며 시를 쓰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산다는 것, 혹은 사랑한다는 것도 이와 같으니 세상에 쉬운일이란 없다.

좀 쉬운 일을 누워서 떡 먹는 일이라고 하던데 누워서 떡 먹어보니 그것조차 어렵다.

잘 쑨 죽처럼 잘 쓴 시를 골라 읽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작년에 남해에 가서 먹었던 전복죽처럼 푸르딩딩 맛있는 시를 읽어 볼까나.

 

 

* joofem.tistory.com / "JOOF HOUSE"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