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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광장 시인탐방 / 홍해리

洪 海 里 2023. 10. 15. 09:55
- 시인광장 시인탐방

시인광장 시인탐방【83】손현숙의 시인탐방[13]홍해리, 온몸으로, 몸으로 갈 수 없는 곳까지 간다! ■ 대담: 손현숙(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웹진 시인광장 2017년 5월호[통호 제97호]

2017. 5. 17.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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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현숙의 시인탐방                 13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7년 5월호

 

 

  사진 설명:     청악매가 피는 하늘아래, 4.19공원에서 우이동의 시인들과 함께 했다. 날은 꽃을 시샘하듯 흐렸지만, 카메라 속의 선생은 아름다웠다.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7년 5월호(2016,  May) 

 

 

                                                                                                □ 홍해리 시인

* 1942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하여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1964)하고 1969년 시집『투망도投網圖』를 내어 등단함.
* 1986년 <우이동시인들>(이생진, 임보, 채희문, 홍해리) 동인을 결성하고 '87년부터 동인지를 발간하고 '우이시낭송회'를 매달 마지막 토요일 도봉도서관에서 개최해 오고 있음. '우이시회'를 2007년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로 개편하고 《우이시》의 제호도 《우리詩》로 바꾸어 매달 발간해 오고 있음. 초대 및 2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한운야학閑雲野鶴이 되어 살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다시 그 직책을 맡고 있음. 앞으로는 은산난정隱山蘭丁의 정신으로 조용히 살고 싶음.

* 시집으로 『투망도投網圖』(선명문화사, 1969)『화사기花史記』(시문학사, 1975)『무교동武橋洞』(태광문화사, 1976)『우리들의 말』(삼보문화사, 1977)『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민성사, 1980)『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청별淸別』(동천사, 1989)『은자의 북』(작가정신, 1992)『난초밭 일궈 놓고』(동천사,1994)『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애란愛蘭』(우이동사람들, 1998)『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푸른 느낌표!』(우리글, 2006)『황금감옥』(우리글, 2008)『비밀』(우리글, 2010)『독종毒種』(도서출판 북인, 2012)『금강초롱』(도서출판 움, 2013)『치매행致梅行』(도서출판 황금마루, 2015)『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움, 2016)와,
* 三人詩集(김석규 · 이영걸 · 홍해리)으로『산상영음山上詠吟』(금방울사, 1979)『바다에 뜨는 해』(금방울사, 1980)『元旦記行』(중앙예림사, 1981)이 있고,
* 시선집으로『洪海里 詩選』(탐구신서 275, 탐구당, 1983)『비타민 詩』(우리글, 2008)『시인이여 詩人이여』(우리글, 2012)가 있음.

 

​                                                                                               ■ 손현숙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99년 《현대시학》에 <꽃터진다, 도망가자> 외 9편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문학사상사, 2002)와 『손』(문학세계사, 2011)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현암사, 2005)와 『나는 사랑입니다』(넥서스, 2012)와 『경계의 도시, 공저』(경기도문화재단, 2016)와 『천만 촛불 바다, 공저』(실천문학, 2017)가 있음. '국풍' 사진공모 수상,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수상. 2002년과 2005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0년 서울문화재단 기금 수혜. 2015년 경기문화재단 기금 수혜. 고려대학교 박사수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홍해리, 온몸으로, 몸으로 갈 수 없는 곳까지 간다!

  

 <들어가며>

 

  선생을 만나지도 벌써 십 수 년이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선생을 떠올릴 때마다 한 자리, 한 가지의 모습이다. 모자를 쓰고 꼿꼿하게 등줄기를 세우시고 침묵하는 일.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말을 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존재가 흐려지는 법도 없다. 선생은 언제나 거기 있어서 아름다운 자연처럼 우이동 골짜기에서 시를 쓰고 가끔은 매화 향에 취해서 술잔을 기울이신다. 아, 매화! 선생에게 배운 매화는 청악매. 꽃받침이 푸르러서 청매라고도 부른단다. 매화의 종류가 그렇게 많고 또한 향기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어서 암향暗香이라 부른다는 것을 나는 선생에게서 배웠다. 너무 짙고 붉은 매화는 흑매, 혹은 비매. 그리고 홍매. 그리고 백매. 그런데 놀랍게도 매화의 향기는 모두 비밀처럼 짙고 깊고 아득해서 현현한 향이라는 것은 시보다 더 시적으로 다가왔었다. 새벽 3시에 기침을 해서 하루에 한 수 씩 시를 짓는 이 시대의 마지막 가객. 나는 선생을 그렇게 부른다.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시 속에 파묻혀서 시를 짓는 시인. 그런데 선생은 사실 고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모던한 시인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먹물의 냄새 보다는 야인의 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것은 또 뭘까. 젊은 피가 넘치는 시절에는 우리의 산과 들을 헤매면서 고고하게 살아있는 난초를 찾아 몸을 움직였었던 시인. 온 몸으로, 몸으로 시를 쓰면서 한 가지에 목을 매다 보면 소실점처럼 하늘과 땅이 맞닿는 다는 것을 맹목으로 믿어버린, 그는 시방 시로써 목이 길어진 슬픈 짐승이다. 나는 그를 진짜 시인, 저절로 시인이라고 혼자 읊조린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길목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꽃다지를 발견하고, 언제나 처음처럼 시를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선생은 한번 정한 일에는 그다지 미련이 없는 듯했다. 마치 이것으로 망해도 좋다는 생각이 뼈 속 깊이 각인이 된 듯,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맹목으로 밀어붙인다. 시도 오래 생각 한 후에는 일필휘지, 딱 한 번에 한 세상을 종이 위에 그린다. 생각해보면 사는 일이란, 선생의 신념처럼 딱 한 번에 한 가지의 상념을 종이 위에 옮겨 적는 일이 아닐까. 선생은 그렇게 오래도록 시와 함께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멀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앞으로도 같은 모습일 것을 믿는다. 시인! 그에게 그 말 외에는 무슨 말을 할까. 그리고 지금 선생은 치매를 앓고 있는 부인 곁에서 지극하다. ‘치매기행’이란 시집을 내놓으시고 참으로 오래도록 담담하시다. 담담하게 아내를 거두신다. 품으로 파고드는 아내를 가만히 안아보며, 아내여, 나를 알아보는가? 대답 없는 여자를 향해 그저 침묵으로 아내를 품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만, 이라고 말려도 아내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 아내의 남편으로, 시인으로,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흘러가면서 그는 웃는다. 담담하게 메아리 없는 시인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 주목 받지 않아도 괜찮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가을 들녘에 서서​】전문

 

 

질문 1/ 선생님, 그동안 어찌 지내셨는지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삶은 참으로 복잡하기만 합니다. 독자들은 은자처럼 지내시는 선생님의 근황을 궁금해 하거든요.

대답1/ 국립4․19민주묘지에 있는 백매(청악매)가 필 때면 꼭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해서 꽃이 피기 얼마 전부터 그곳을 서성대며 매화나무를 살펴온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꽃이 피면 연락해서 꽃구경을 하면서 일 년에 한 번 매화가 보여 주는 시를 감상하는 귀한 시간을 함께해 오고 있습니다. 해서 이런 글도 나오게 되었지요.“지금은 관음觀音 문향聞香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방향을 잃은 벌들처럼/ 무심하게 걸음을 재촉하며 헤매고 있다/ 한 시인 있어/ 막 터뜨리는 꽃망울을 보며/ 절창이야, 절창이야, 꽃을 읊고 있다”(「매화, 눈뜨다」부분). 요즘도 우이동 골짜기를 벗어나지 않고 집과 시수헌(우리시회 사무실)을 오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걸어서 40여 분 걸리니 걸어 다니기에 딱 좋습니다.

 

질문 2/ 저 절창 속에 누군가 설핏, 얼굴이 지나가기도 하네요.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생각입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가능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지금 당장 떠오르는 색깔이 있으신지요? 생각하지 말고 대답해 주시길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장면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대답 2/ 색깔 하면‘녹색’이지요. 녹색을 좋아한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휴식, 이상, 평화를 상징하는 색깔이지요. 봄이 익어가면서 연두색이 녹색으로 변하는 모습도 꽤 즐기는 편입니다. 새벽잠이 없어 일찍 일어나는데 곧바로 마당에 나가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마당에 심어 놓은 고추, 상추, 더덕, 하수오, 돌나물, 부추가 뿜어내는 푸른빛을 즐깁니다. 마당가에 심은 오죽烏竹이 무소식이어서 물을 듬뿍 주었더니 실한 죽순이 바로 치솟아 올라 내게 힘을 실어 주더군요. 잠을 깨면 생각하고 나가서 만나는 자연의 축복입니다.

 

# 오늘이란 무엇인가, 사랑이 해답이다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산책】 전문

 

질문 3/ 선생님의 새벽은, 아니 하루는 참으로 청아하게 시작을 합니다.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선비의 모습 같아서 참으로 마음이 청아해지고요. 그저 선생님 고맙습니다, 라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온답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을 뵈면서 타인의 눈치를 절대로 보지 않는 깡다구! 시의 깡패! 라는 단어를 곧잘 떠올렸습니다. 본인의 깡, 에 대해서 그리고 그 깡다구가 시에는 어떻게 상관관계를 맺는지요?

 

대답 3/ 지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걸 종종 듣긴 하지만 나는 깡다구니 깡이니 하는 말, 더구나 깡패 같은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위가 아니라 물 같은, 칼이 아니라 묵이나 두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나 좋으면서 싫다거나 싫으면서 좋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싫고 좋은 것은 칼같이 구분하는,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는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제 성격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쓴 작품에 그런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질문 4/ 맞아요, 싫은 걸 좋다고 혹은 좋은 걸 싫다고 말씀하시는 걸 본적이 없습니다. 정신이 고고하셔서 어쩌면 선생님 곁이 허전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답니다. 그렇게 선생님을 오래 뵙고 살면서 참으로 한결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말씀도, 걸음도, 심지어 이렇게 오래 끌고 오신 ‘우리詩’에 대한 담담한 시선조차도 한결같으신데요. 그것은 결국 선생님의 내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선생님의 유년이 궁금해집니다. 선생님, 유년의 삶은 어떠셨는지요?

대답 4/ 내가 태어난 해가 41년이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그 당시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부유하지 않은 가정이었지요. 그래도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으니 좀 나은 편이긴 했지만 내겐 밑으로 남동생이 세 명, 그 아래로 여동생이 네 명, 해서 나는 우리 집의 소대장이었습니다. 한 집안의 장손, 장남으로서의 생활이 오늘날까지 내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까지 십여 리를 신작로나 산길로 다니면서 산과 들에서 만나는 초목과 곡식, 특히 새나 곤충과의 교통, 이러한 자연과의 교감이 내겐 큰 선물이었고 보약이고 또한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이런 삶이 내가 시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은자의 권력!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 【금강초롱】 전문

 

 

질문 5/ 어린 홍해리가 눈에 선합니다. 위에서 ‘우리詩’에 대하여 살짝 언급을 하긴 했지만, 이쯤에서 ‘우리詩’의 연혁에 대하여, 그리고 선생님에게 ‘우리詩’의 의미는 무엇인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답 5/ 1986년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 골짜기 우이동에서 소리치면 서로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던 이생진, 임보, 홍해리, 채희문 시인이 <우이동시인들>이라는 동인을 만들고 이듬해인 1987년 3월 동인지『牛耳洞』제1집을 간행했습니다. 그리하여 창간호 간행 기념으로 5월 29일 우이동 덕성여대 입구에 자리한 커피숍 <파인웨이>에서 시낭송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우이시낭송회(牛耳詩會)'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내가 사회를 본 그 자리에는 <우이동시인들> 외에 황금찬, 정성수, 박정만, 박민수, 문효치, 손보순, 김년균, 윤강로, 황도제 등 여러 시인들이 참가했고, 제2회 시낭송회는 동인지 제2집을 간행하고 1987년 10월 30일(금) 우이동에 있는 <明東>다방에서였는데 동인 외에 박희진, 추명희, 문효치, 황도제, 이무원, 김동호, 정성수 시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임 보 시인의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분들 가운데 이미 이승을 떠난 시인들이 벌써 여러 명입니다.

이후 시낭송회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 도봉도서관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현재 347회를 맞고 있습니다. 우이시낭송회의 특성은 매월 정규적인 시낭송을 하는 외에도 연례행사로 봄과 가을에 북한산록의 시제터인 '우이도원牛耳桃源'에서 <삼각산시화제三角山詩花祭>(매년 4월 마지막 토요일)와 <삼각산단풍시제丹楓詩祭>(매년 10월 마지막 토요일)를 갖습니다. 백화가 만발하는 봄과 천자만홍의 단풍철에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면서 그러한 자연을 주신 천지신명께 감사하며 시와 노래와 춤으로 제를 올리는 의식입니다. 자연 속에서 갖는 시의 축제 마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7년 1월 우이시회를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로 개편하여 발전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매달 시지《우리詩》를 발간하는 일입니다. 그간 어려움도 있었지만 한 번도 결호를 내는 일이 없이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은 150여 명의 회원들이 적극 협조해 주었고 외부의 필자들께서도 아낌없이 격려와 후원을 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는‘우리詩’가 없는 홍해리라는 마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질문 6/ 저는 ‘우리시’에서 주최하는, 봄과 가을 야외에서 열리는 ‘삼각산 시제’ 그리고 여름 ‘해변시인학교’가 열리는 ‘우리詩'를 참으로 사랑합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이는 순연한 마음결의 시인들을 사랑하는 모양입니다. 그 속에 선생님이 서 계신거지요.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을 뵈면 언제나 몸으로 수행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보는 듯합니다. 이상한 것은 나는 왜 선생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인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믿어집니다. 시가 선생님의 몸속으로 걸어 들어온 특별한 계기나 동기가 있으신지요?

 

대답 6/ 그건 내 성격 탓이겠습니다. “말도 짧게, 시도 짧게!” 이런 탓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것도 싫어하고 혼자 조용히 사는 걸 좋아하다 보니 밖으로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책이나 읽고 시랍시고 끼적이는 것이 전부이니 시를 쓰게 된 특별한 계기나 동기란 것도 없습니다. 늘 시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데 시의 씨나 알이 내게 잘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오는 것도 잡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잦아 안타깝습니다.

질문 7/ 매일 새벽에 일어나셔서 매일 시 쓰시는 거, 다 알아요, 선생님! 그렇게 선생님의 시를 읽다가 보면 자연친화적인 요소들이 참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고요, 오히려 관조적이란 생각도 들거든요. 너무 깊어서 현현한 슬픔과도 닿아 있습니다. 어떤 원초적인 슬픔과 느닷없이 맞닥뜨릴 때 선생님의 시적 포즈는 무엇입니까?

 

대답7/ '自然'이란 참으로 오묘하고 위대합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자연과 만나게 됩니다.건강하게 지내고 건필하면서 또 '한고비'를 넘기고 또 넘기는 하루하루가 내 삶이 아닌가 합니다. 나의 시를 읽다보면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시「황태의 꿈」중에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 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사는 일이 늘 힘들었고 한편으로는 힘들지 않았던 듯합니다. 좋은 일 뒤에는 반드시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고 어려운 일을 이겨내면 신나는 보상을 받는 것이 진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힘들 때는 내가 내게 기대 등을 비비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으니 꽃은 꽃이었고 똥은 똥이었습니다. 그런 생각과 마음가짐은 앞으로도 아마 변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질문 8/ 단도로 직입하고, 단칼에 해결을 보시고요. 저는 그런 힘을 선비정신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답니다. 원하는 것이 없으니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니 자유 한 것이겠지요. 그거 아무나 행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알아요, 선생님. 그나저나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셨지요? 어떻게 시와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대답 8/ 나는 대학에서 김치규 교수(김종길 시인)에게 19세기 영미시, 20세기 영미시와 T. S. 엘리엇을 배우면서 시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국문과에 계셨던 조동탁 교수(조지훈 시인)에게서 시론과 현대문학을, 박성의 교수에게서 가사문학을 배우면서 시를 껴안기 시작했습니다. 김종길 시인께서는 오랫동안 수유리에 사셔서 우이동에 사는 제가 종종 모시고 식사를 하면서 많은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올봄에 돌아가셔서 허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지훈 시인께서 검은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강의실에 들어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분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4년 뒤인 1968년에 지병으로 4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 분에게서 배운 것이 내가 시를 쓰게 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두 분 시인에게서 '시의 뼈'를 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시, 역삼각형의 불안

 

  1

  세상에서 제일의 맛은 독이다

  물고기 가운데 맛이 가장 좋은 놈은

  독이 있는 복어다

 

  2

  가장 무서운 독종은 인간이다

  그들의 눈에 들지 마라

  아름답다고 그들이 눈독을 들이면 꽃은 시든다

  귀여운 새싹이 손을 타면

  애잎은 손독이 올라 그냥 말라죽는다

 

  그들이 함부로덤부로 뱉어내는 말에도

  독침이 있다

  침 발린 말에 넘어가지 마라

  말이 말벌도 되고 독화살이 되기도 한다

 

  3

  아름다운 색깔의 버섯은 독버섯이고

  단풍이 고운 옻나무에도 독이 있다

 

  곱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독종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하면서도 독종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라는 못된 종자이다.

 

  4

  인간은 왜 맛이 없는가?

  - 【독종毒種】 전문

 

질문 9/ 김종길 선생님의 ‘고고’와 조지훈 선생님의 ‘승무’는 제 시의 길라잡이이기도 합니다. 그런 대가들의 제자셨군요. 그래서 선생님의 자태 또한 ‘고고’하실 수 있으셨네요. 개인적으로 많이 부럽습니다. 언젠가 김종길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한 번 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 선생님께서 스승인 김종길 선생님을 무척 어려워 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좋아보였엇거든요. 자, 선생님께서 지난번에 출간하신『치매행致梅行』은 참으로 먹먹한 시집입니다. 삶이 참으로 슬프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사모님의 근황은 어떠신지요?

 

대답 9/ 우선 그 시집을 내고 나서 많은 분들로부터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에게 우선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대부분 좋은 말씀만 해 주셔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시집에 들어 있는 150편의 시가 병든 아내에 대한 관찰 기록이요,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의 글이었는데 막상 책을 내고 보니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는/못하는 아내를 보면서 시랍시고 써서 책을 냈으나 아내는 그것조차도 관심은커녕 알지 못하니 답답한 심정일 따름입니다. 아내는‘매화에 이르는 길’(이번에 내는 시집의 제목)을 따라 매화꽃이 피어 있는 마을로 아무 말도 없이 점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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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0/ 시집 제목이 매화에 이르는 길’이라고요? 아, 아름답습니다. 예술은 그렇게 잔인한가봅니다. 예술의 숙주는 고통, 맞네요. 그래도 사모님을 묵묵히 지켜내시는 선생님은 참으로 힘이 센 분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만큼에선 지치실 것도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조마조마 하기도 하고요. 약간은 우문입니다, 현답을 부탁드리려고요. 시와 삶의 남루랄까, 가난이랄까, 존재방식이랄까, 뭐 그런 것들은 시와 어떻게 병행하는 것일까요?

 

대답 10/ 아픈 아내 덕분에 시집을 두 권이나 내게 되었으니 아내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지요. 재작년에 낸 시집 『치매행』에는 150편의 시를 실었고 이번『매화에 이르는 길』에는 80편의 시가 들어 있습니다. 230여 편의 작품이 아픈 아내를 지켜보면서 관찰한 기록이고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의 글들입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를 아내가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의 가난이나 남루를 꽃으로 피워 주는 거라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질문 11/ 아픔의 기록들이겠지요. 우리는 모두 살아있어서 슬픈 존재들일지도 모르잖아요. 선생님의 시들을 곰곰 읽다가 보면 시 속의 화자는 약간의 방랑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실제로 선생님의 청춘은 방랑가객이셨는지요?

 

대답 11/ 이런 이야기까지 드러내면 내 본색이 다 탄로가 나고 말 텐데요. 어느 시인은 나를 '바람 같은 사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70년대 중반부터 20여 년을 난초에 미쳐 살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토요일이 휴일이지만 그때는 오전 수업을 하고 미리 준비해온 배낭을 메고 서울역에서 기차로 난초가 많이 나는 남쪽 해안 도서지방의 자생지를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그땐 나름대로 계획과 꿈을 가지고 난을 모으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온실에 천여 분의 난을 가꾸면서 바람처럼 살았습니다.

 

질문 12/ 한번 무엇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 맞지요? ‘천여분의 난’이라니요? 정말 굉장합니다. 그것들을 손수 모으고 키우고 또 바라봣단 말씀이지요? 저는 상상도 못할 광경이네요. 그 많은 난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느닷없지만,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다 보면서 꽂혔던 두 가지 사건만 말씀해 주세요.

 

대답 12/ 그렇습니다. 첫째는 사랑 이야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자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대학에 다니는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나이 차가 많이 났지만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끝장을 보고 말았지요. 두 번째는 70년대 중반 난초에 미쳤던 것이 내겐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한 20여 년 난과 동거를 했으니 아내나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질문 13/ 토끼는 두 귀를 잡아야 잡히는 것이고, 고양이는 뒷덜미를, 그리고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제대로 잡은 것이라면서요. 선생님은 오래도록 시마詩魔에 사로잡혀서 꼼짝없이 오늘까지 오신 거, 우리는 잘 안답니다. 선생님에게 시란, 무엇일까요?

대답 13/ 모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도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많은 시간을 자연과 함께 하면서 자연에 가까운 작품을 쓰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시를 쓴다고 해도 한 송이 꽃을 보면 부끄럽습니다.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으면 또 부끄러워집니다. 한 포기 작은 풀을 보면 창피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한 그루 나무를 보면, 바위를 보면, 산을 보면, 호수나 강을 보면, 아니 바다를 보면 시인의 기는 팍 죽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기를 살리는 것이 시와 함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자연'입니다, 요즘 나의 화두는.

  "이름 없는 풀이나 꽃은 없다, 나무나 새도 그렇다/ 이름 없는 잡초, 이름 없는 새라고 시인이 말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모든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다/ 이름없는 시인이란 말이 있다/ 시인은 이름으로 말해선 안 된다 다만 시로 말해야 한다/ 이름이나 얻으려고 장바닥의 주린 개처럼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기웃대지는 말 일이다/ 그래서 천박舛駁하거나 천박淺薄한 유명시인이 되면 무얼 하겠는가/ 속물시인,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꺼귀꺼귀하는 속물이 되지 말 일이다/ 가슴에 산을 담고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스럽게 사는 시인/ 자연을 즐기며 벗바리 삼아 올곧게 사는 시인/ 욕심 없이 허물없이 멋을 누리는 정신이 느티나무 같은 시인/ 유명한 시인보다는 혼이 살아 있는 시인, 만나면 반가운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될 일이다."

-「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시선집『시인이여 시인이여』의 '시인의 말')의 마지막 부분.

 

  이 말씀이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시인이 쓰는 글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싫고 말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산문을 써 달라 하면 늘 거절하느라 애를 먹는 내가 오늘은 너무 수다스러웠습니다.

질문 14/ 제가 바라보기엔 우뚝 서 계신 분인데, 늘 부끄럽고 창피하고 조촐하다고 생각하면서 사시는 선생님은 아름답습니다. 혹시, 다음 생이 다시 주어진다면 역시 시, 를 쓰실 건가요?

 

대답 14/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아마 인생人生이 아니라 식생植生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한 그루 나무로 서서 청청한 그늘이나 드리워 지치고 고단한 이들의 쉼터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른봄에 피어나는 꽃다지로 푸른 하늘을 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질문 15/ ‘식생植生’이라는 말 좋네요. 선생님은 식물성에 가까운 시인, 맞습니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문학은 스스로를 구원함으로써 세계에 기여한다, 라는 글귀가 생각이 나네요. 여기 시인광장은 시인들 말고도 일반 독자들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라서요. 오래도록 시를 쓰고, 읽고, 살아오신 선생님의 시론이랄까,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대답 15/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변두리 시인이면 어떻고 아웃사이더면 어떤가/ 목숨이 내 것이듯 시도 갈 때는 다 놓고 갈 것이니 누굴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시는 시적是的인 것임을 시인詩人으로서 시인是認한다/ 생전에 상을 받을 일도, 살아서 시비를 세울 일도 없다/ 상으로 상을 당할 일도 아니고 시비詩碑로 시비是非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다/ 시인은 새벽 한 대접의 냉수로 충분한 대접을 받는다/ 시는 시로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받을 보상이다. - 「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를 위하여」(시집『비밀』의 ‘시인의 말’ 끝 부분)에서 옮김.

 

  오로지 이런 생각으로 이제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시를 쓰면서 시와 함께 재미있게 놀려고 합니다. 한가로운 구름장처럼, 들판에 거니는 외로운 학처럼 유유悠悠하며 자적自適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몇 권의 시집을 더 내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 사랑은 고통? 고통! 아니다, 황홀이다

 

질문 16/ 저도 선생님의 말씀 오래도록 가슴에 새기면서 살겠습니다. 자, 단도로 직입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사랑의 힘을 믿고 계시는지요?

 

대답 16/ 사랑은 삶이지요. 삶이란 사는 일이니 그 삶을 삶이게 만드는 요소는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그 힘이 나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지탱해 줍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이란 보편적인 사랑이고 우주적인 사랑이긴 합니다만. 이성에 대한 사랑도 내 생명을 꿈틀대게 하는 원초적인 힘이고 동시에 소중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아프고 허망한 황홀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픔도 사랑이고 슬픔도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채우고 비우는 재미, 쌓고 허무는 재미! 그래 이런 시도 쓰게 됩니다. “번개 치고/ 천둥 울고/ 벼락 때리는// 국지성/ 집중 호우,// 또는/ 회오리바람.”(「사랑」전문) 또는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초롱꽃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금강초롱」전문)처럼 어쩌면 눈물 나는 슬픈 사랑노래도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것을 늘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것일까 파고 또 파도 보이지 않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기듯 허망한 그림자만 흐릿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나는 금강경을 파면서 남은 생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 쇠북은 내가 죽어야 울리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때도 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낮과 밤이 바뀌어도 시는 시다, 형식의 고수!

 

  입이 큰 여자가 하얗게 울고 있었다

 

  탱자나무 감옥에 갇힌 달을 안고

  여자가 천 길 절벽으로 뛰어내리자

  대청호大淸湖 물고기들이 튀어올라

  온몸으로 현암사懸巖寺 쇠종을 치고 있었다

 

  삼천 송이 목련꽃이 지던 밤이었다.

  - 【곡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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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7/ 슬픔도 사랑, 맞아요. 사랑이라는 음상은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게 아름답지요. 그 소리음이 사라짐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고요. 죽음이 있어서 삶이 아름다운 것처럼요. 사실 손에 잡히지 않아서 또 사랑이 신비롭기도 하고요. 모두 살아있어서 짓는 무늬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도 봄 시화제를 북한산 자락에서 하셨는지요? 혹시 힘들지 않으세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시낭독회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시낭독회는 단연 ‘우리詩’가 아닐까, 생각을 하거든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행사가 참으로 알차다는 느낌이 있어서요. 봄과 가을에는 산에서 시제를 올리고 또 여름에는 여름시인학교를 개최하고 계시지요? 그 행사를 조금 소개해 주시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대답 17/ 지난 4월 29일 북한산 자락‘우이도원’에서 어김없이 천지신명께 제를 올리고 시와 음악, 춤으로 하루를 자연 속에서 풀처럼 나무처럼 꽃처럼 새처럼 놀며 지냈습니다. 30여 년 동안 봄가을로 시화제와 단풍시제란 명칭으로 행사를 해 오고 있는데 날씨 때문에 시제를 망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천지신명께서 도와주시는 것으로 알고 매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름에는 여러 지역을 찾아다니며 그곳 시인들과 함께 어울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여름시인학교를 개최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는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으로 가서 그곳의 맑은 정기를 받으며 전국에서 모여든 시인들과 여름시인학교를 열고자 준비 중에 있습니다. 우리시회의 외부 행사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있습니다.

 

질문 18/ 행사 때마다 날씨로 망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말씀이 노랍네요. 정말 신께서 살피시는지도 모르겠어요. 자, 선생님은 오래도록 시의 길을 걸어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 시의 길을 걸어가실 분이시고요.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선생님을 시, 로 살게 한 것일까요?

 

대답 1/ 허기! 삶에 대한 허기가 나를 시인이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노을이 타는/ 바닷속으로// 소를 몰고/ 줄지어 들어가는// 저녁녘의/ 여인들// 노을빛이 살에 오른/ 바닷여인들.”(「갯벌」전문) 이 작품이 1964년 여름에 내가 시라고 써 본 최초의 글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다가 그리워 인천에 직장을 잡고 오후엔 바닷가에 나가 바다 구경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허기를 때우지 못하고 삽니다. 어떤 때는 내 영혼이 어디 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방황하고 있는 영혼을 찾아다니는 일이 시를 쓰는 작업이 아닐까 합니다.

 

질문 19/ 인간은 어쩌면 갈망 속에서 무엇인가를 이루는 참으로 깨지기 쉬운 존재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서요. 만약에요, 시의 악마가 시 하나 줄 테니 너는 내게 뭘 줄래? 유혹한다면 선생님은 선생님의 무엇을 당장 내놓으실 건가요?

 

대답 19/ 악마의 시 한 편을 받으면 나는 천사의 시를 한 편 돌려줘야겠지요. 내 재주로 그리 쉽게 시 한 편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빈자일등貧者一燈 같은 시 한 편이면 족하겠지요. 언제나 시와 내가 함께하고 서로 돕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면 좋겠지요. 말로나마 대짜 중짜 소짜 따질 것 없는 게 내 詩여서 일에 묻혀 쉴 겨를이 없는 골골무가汨汨無暇의 남은 生이기를 바랄 뿐이지요.                 

 

말없이 살라는데 시는 써 무엇 하리

흘러가는 구름이나 바라다볼 일

산속에 숨어 사는 곧은 선비야

때 되면 산천초목 시를 토하듯

금결 같은 은결 같은 옥 같은 시를

붓 꺾어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시 쓰는 일 부질없어 귀를 씻으면

바람소리 저 계곡에 시 읊는 소리

물소리 저 하늘에 시 읊는 소리

티없이 살라는데 시 써서 무엇 하리

이 가을엔 다 버리고 바람 따르자

이 저녁엔 물결 위에 마음 띄우자.

- 【시인이여 시인이여 -詩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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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며>

 

  사람이 한결 같다는 것은 늘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행할 수 있는 덕목은 아니다. 선생은 매일 새날인 오늘을 매일 새것으로 갈고 닦는다. 문득, 생각나는 옛날이야기 하나. 이백이 산에서 시를 걷어차고 하산하는 길이었단다. 물가에 노옹이 앉아서 칼을 갈고 있더라는 데, 무엇을 하는가? 질문하자, 노옹이 신선처럼 대답하기를 칼을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중이라고 하더라는 이야기. 불가능일까? 쉬지만 않으면 가능하다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그 길로 이백은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서 그의 업을 행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왠지 우이동 골짜기의 은자, 홍해리 선생님을 떠올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를 탁마하는 시인. 그래서 그는 그냥 시다, 시인이다. 시고 뭐고 까다롭게 따질 것도 없이 선생은 처음부터 저절로 시인이다. 무엇보다 인터뷰를 하면서 사랑에 관한 단상은 언제나 슬퍼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슬픈 사랑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수행중이시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를 향한 일편단심은 그래서 서럽도록 아름답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라니, 너무 깊고 깊어서 향기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암향暗香의 매화에 부인이 지금 들고 있다는 뜻일 터. 그 길은 인간의 발로는 걸어갈 수도 없고 물론 짐작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내는 이쪽을 거절하고 저쪽으로 점점 깊이 접어들면서 매화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선생의 결론은 아름답다. 그러나 사람의 살림살이는 만지고 볶고 지지고 다투면서 서로 눈을 마주쳐야 하는 법 일진데. 감히 외로우시냐고 묻지는 못했다. 대신 선생님에게는 시가 있잖아요, 라고 허한 대답만 올렸을 뿐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시란 오롯한 생명임을 알기에 더 이상의 물음과 대답은 삼가기로 했다. 그저 깊이 천지신명께 선생의 시와 건강을 기도드렸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7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