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2025년 1월호 신작 소시집
나이 팔십 외 5편
洪 海 里
어제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일
오늘
갑자기 할 수 없는 나이
그게 팔십이라네.
가난하면 가난에게 감사하고
슬프면 슬픔에 고마워하는 나이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고
들리는 대로 듣는 나이
그게 팔십이라네.
마지막 편지
가으내 겨우내 너를 기다리다
만나지 못하고 이제 간다고
마지막으로 한 자 적어 남긴다
죽을 때까지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라고
사날 좋게 살 만큼 살아 보라고
세상에 특별할 게 뭐가 있다고
저 혼자 못났다고 우는 것이냐
꽃이나 푸나무가 우는 것 봤냐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너요
세상의 중심이 바로 너요
세상을 세상이게 하는 게 바로 너다.
시비詩碑
저 크고 무거운 걸
어찌 지고 가려고
가벼운 시 한 편
그게 뭐라고
무거운 돌에 새겨
세워 놓았나
"늬가 시를 알아?" 하고
큰소리 칠 시인이 없네.
지날결
지구가 펄펄 끓어오르니
누군들 별수 있겠느냐
제 일 아닌 남의 일이라고
다들 떠들고 욕하기 바쁘구나
한강은 흘러가기 마련이고
삼각산은 그 자리 우뚝하지 않느냐
춤출 것도 없고
발광할 일도 아니니
그냥
지날결이라 편히 여기거라.
말로 끝나는 말
언제
밥 한번 먹자
우리
술 한잔 하자
마음이 허기져서
이리저리 혼자 떠돌다
어차어피에 너나 나나
홀로 가기 마련인데
말해서 뭘 해
말로 끝나는 말.
내가 나에게
아플 땐 아프다는 말
할 줄 알거라
앓는 소리 한다고
누가 뭐라냐
아픈 건 너지
내가 아니다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소중한 게 목숨일시
옴쭉달싹 못하면서
미련 떨지 말거라, 미련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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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나이 늘고 시는 줄고
첫시집 『투망도投網圖』를 낸 지 쉰여섯 해가 된다. 많이 늙었다. 시집도 늙고
나도 늙고 새로 쓰는 시들도 늙어가고 있다. 익지 못하고 그냥 늙어 떨어지고 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지난해 팔월 하순부터
십일월 초순까지 내 평생에 가장 심한 아픔과 고통을 겪는 어둡고 무거운 시간을 보냈다.
신작 소시집으로 발표하는 여섯 편은 육란성태아六卵性胎兒로 작년(2024) 시월
하순에 고통이 내게 가져다준 아픔의 선물이다.
나이를 먹으면 시도 그만큼 곱고 단단하게 익어가야 할 텐데 그냥 물러 떨어지다니,
어처구니없다. 이제 쓰는 양도 줄고 질도 떨어지기만 하고 있다. 단순한 생각에 단순한
표현, 맛도 없고 멋도 없다.
이런 답답한 세상에서 시가 무엇인가, 시인은 누구인가를 내가 내게 한번 묻고 싶다.
그래서 전에 시에 대해 쓴 글 두 편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 노트>에 올려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서 나 스스로를 다그치고자 한다.
새벽 세 시 내 등짝을 내려치는 죽비 소리여!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변두리 시인이면 어떻고 아웃사이더면 어떤가
목숨이 내 것이듯 시도 갈 때는 다 놓고 갈 것이니 누굴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시詩는 시적是的인 것임을 시인詩人으로서 시인是認한다
생전에 상을 받을 일도, 살아서 시비를 세울 일도 없다
상賞으로 상傷을 당할 일도 아니고 시비詩碑로 시비是非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다
시인은 새벽 한 대접의 냉수로 충분한 대접을 받는다
시는 시로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받을 보상이다."
- 「명창정궤明窓淨几의 詩를 위하여」의 일부, 시집 『비밀』(우리글, 2010)
"이름없는 시인이란 말이 있다
시인은 이름으로 말해선 안 된다
다만 시로 말해야 한다
이름이나 얻으려고 장바닥의 주린 개처럼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기웃대지는 말 일이다
그래서 천박舛駁하거나 천박淺薄한 유명시인이 되면 무얼 하겠는가
속물시인,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꺼귀꺼귀하는 속물이 되지 말 일이다
가슴에 산을 담고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스럽게 사는 시인
자연을 즐기며 벗바리 삼아 올곧게 사는 시인
욕심없이 허물없이 멋을 누리는 정신이 느티나무 같은 시인
유명한 시인보다는 혼이 살아 있는 시인, 만나면 반가운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될 일이다."
-「고운야학孤雲野鶴의 詩를 위하여」의 일부, 시선집 『시인이여 詩人이여』(2011,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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