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 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월간 《牛耳詩》 2002. 11월호(제173호) 게재.
- 시집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산책
洪 海 里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시집『독종』(2012, 북인)
산책
洪 海 里
한발 한발 걸어가면
발로 읽는 책 가슴속에 비단길 펼치고
눈으로 듣는 책 마음속에 꽃길을 여니
줄 줄만 아는 산 책에 줄을 대고
한없이 풀어 주는 고요를 돌아보라
줄글도 좋고 귀글이면 또 어떤가
싸목싸목 내리는 안개, 그리고 는개
온몸이 촉촉이 젖어 천천히 걸어가면
산 책 속에 묻히리니,
입으로 듣고 귀로 말하라
인생은 짧고 산책은 길다.
시인이여 詩人이여 - 시환詩丸 洪 海 里 말없이 살라는데 시는 써 무엇 하리 흘러가는 구름이나 바라다볼 일 산속에 숨어 사는 곧은 선비야 때 되면 산천초목 시를 토하듯 금결 같은 은결 같은 옥 같은 시를 붓 꺾어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시 쓰는 일 부질없어 귀를 씻으면 바람소리 저 계곡에 시 읊는 소리 물소리 저 하늘에 시 읊는 소리 티없이 살라는데 시 써서 무엇 하리 이 가을엔 다 버리고 바람 따르자 이 저녁엔 물결 위에 마음 띄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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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난초밭 일궈 놓고』(19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