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2

다저녁때

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 洪 海 里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입춘 추위

입춘 추위 - 치매행致梅行 · 2 洪 海 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어디 가고 싶냐 물어도 묵묵부답 조금 있다 또 문을 엽니다 밖에 나가고 싶냐 물어도 그냥 웃습니다 또 문을 열고 치어다봅니다 누굴 기다리느냐 물어 봐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또 다시 문을 열고 쳐다봅니다 속이 답답하냐 물어도 하늘만 바라보다 문을 닫습니다 입춘 날씨 매섭게 찬데 어찌 봄이 오겠습니까? 문을 열면 칼바람만 제 세상인 듯 쩡쩡하니 밀려듭니다. *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무념무상의 세계의 순진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 이 글「치매행致梅行」은 수많은 치매환자를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결코 치사찬란恥事燦爛한 일이 아니다. - 隱山蘭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