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 치매행致梅行 · 57 洪 海 里 사랑이란 찰나의 찬란한 착각일 뿐 치사하고 유치한 당의정처럼 달기만 해서 때로는 속는 것도 달콤합니다 속이고 속아주는 은밀한 재미 한 번쯤 그 병에 걸리고 싶어 눈멀고 귀먹어 안달도 합니다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밤낮 눈에 밟히는 허망의 그림자에 발목을 잡히는 나날 손톱여물 써는 밤이면 창밖엔 흰 눈이 내리고 바람은 꿈을 싣고 천리를 갔습니다 눈 감으면 만리 밖 그리움도 가슴속에 금빛으로 반짝이지만 온몸에 열꽃이 피어 가시거리 제로 상태 잠들면 식은땀이 강물로 흐르고 시정주의보가 내린 거리를 무작정 달려가는 무모의 질주 별은 희망처럼 멀리 있어 빛이 나지만 사랑은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라며 나의 봄날은 자늑자늑 흘러갑니다.

맹꽁이타령

맹꽁이타령 - 致梅行 · 41 洪 海 里 사는 게 답답해서 막걸리 한잔으로 취생몽사합니다 어쩌다 아내의 종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아내가 나의 종이었습니다 버리는 게 아까워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이 못난 맹꽁이는 한겨울에도 낯선 거리 뒷골목에서 맹꽁맹꽁 웁니다 소리는 나지 않고 울음주머니만 부풀었다 죽었다 합니다 맹꽁맹꽁!

집착

집착 - 치매행致梅行 · 45 洪 海 里 반찬 몇 가지 꺼내놓고 밥을 퍼 아내와 마주앉습니다 아내는 숟가락이면 숟가락, 젓가락이면 젓가락으로만 식사를 합니다 낚싯바늘 없는 낚시로 고기를 낚듯 국도 젓가락으로 뜨려 듭니다 반찬도 처음 손이 간 것만 찾습니다 구이면 구이 김치면 김치 고루 먹으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로 한 가지만 잡습니다 다른 것은 보지 않습니다 나도 평생 한 우물만 파야 했습니다.

행복

행복 - 치매행致梅行 · 55 洪 海 里 몸 안의 철이 다 빠져나갈 때 우리는 철이 든다 합니다 철이 난다 합니다 그러니 들고 나는 것이 하납니다 한때는 불 속으로 들어가 설레고 안달했지마는 이제는 은은한 염불소리 물빛으로 흐르는 속에 영혼의 빈자리마다 난초꽃 한 송이 피워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따뜻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떴습니다 아내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갑니다.

나도 가면 안 돼?

나도 가면 안 돼? - 치매행致梅行 · 31 洪 海 里 나도 가면 안 돼? 가면 안 돼? 안 돼? 40년 전이었습니다 아내의 발목을 잡고 매달리며 우는 둘째 녀석을 말리는 큰애 두 놈을 떼어놓고 울면서 아내는 출근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아내, 이제는 내가 외출하려 들면 소맬 잡고 매달립니다 같이 가겠다고, 억지로 밀어놓고 나오는 내 발길이 천근만근입니다 아내도 그랬겠지요 안 돼? 가면 안 돼? 나도 가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