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노래

노래 - 치매행致梅行 · 33 洪 海 里 눈물로 노래를 씻어 부르면 노래마다 구구절절 빛이 날까 눈썹 끝에 별을 달고 홀로 가는 길 별 내린 풀숲에서 실을 짜 엮고 있는 풀벌레들 계절은 가릉가릉 현악기로 울리고 달빛 타고 하늘 가득 날아가는 기러기 떼 허공중에 떠가는 수많은 섬이구나 날갯짓마다 파도가 일어 가을이 젖는데 내 저 섬을 비추는 등대라면 하늘길 안내하는 불빛이라면! - 동양일보 2022. 22. 29.

손톱 깎기

손톱 깎기 - 치매행致梅行 · 5 洪 海 里 맑고 조용한 겨울날 오후 따스한 양지쪽에 나와 손톱을 깎습니다 슬며시 다가온 아내가 손을 내밉니다 손톱을 깎아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손을 내밀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겨우내 내 손톱만 열심히 잘라냈지 아내의 손을 들여다본 적이 없습니다 손곱도 없는데 휴지로 닦아내고 내민 가녀린 손가락마다 손톱이 제법 자랐습니다 손톱깎이의 날카로운 양날이 내는 금속성 똑, 똑! 소리와 함께 손톱이 잘려나갑니다 함께 산 지 마흔다섯 해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 줍니다 파르르 떠는 여린 손가락 씀벅씀벅,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집니다. -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황금마루)

짝 - 치매행致梅行 · 24 洪 海 里 절망과 희망은 한집에 삽니다 슬픔과 기쁨은 같은 이름입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위아래일 뿐입니다 미움과 사랑은 본시 한 몸입니다 삶과 죽음도 한 길의 여정입니다 앞과 등이 따로 보일 뿐입니다 크게 보이고 작게 보일 따름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듯 하물며 짝이 아닌 게 없고 손바닥도 마주쳐 짝짝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아내는 지금 고장난명孤掌難鳴의 외손뼉을 치며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병원길

병원길 - 치매행致梅行 · 17 洪 海 里 아내랑 병원에 갑니다 어디 가느냐 열 번을 묻습니다 왜 가느냐고 또 묻고 묻습니다 그 물음을 나는 가슴에 묻습니다 병원에 간다 의사 만나러 간다 해도 아내는 묻고 또 묻고 그럴 때마다 나는 묻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늘대는 버들가지처럼 흔들리는 내가 바보겠지요 그래도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있어 손잡고 병원 길을 올라갑니다 인생 한 번 살았다고 인생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지나친 길이라고 다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느작아느작 흔들리며 병원으로 들어갑니다.

안개

안개 - 치매행致梅行 · 13 洪 海 里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안 보이니 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내가 없고 내게 네가 없습니다 한평생 누구에게나 가지 못한 길이 있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할 길이 있습니다 쉬운 길도 편한 길도 있었지만 먼 길을 돌아, 이제 자갈길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생각해도 길은 안개에 갇혀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듯 안개가 짙으면 길이 보이지 않아 청맹과니 하나 칠흑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낯선 길 위에서

낯선 길 위에서 - 致梅行 · 12 洪 海 里 온몸이 멍멍해집니다 온종일 막연한 불안감에 마음이 먹먹합니다 낯선 거리에 서 있는 한 사내 어디로 갈지 몰라, 홀로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취된 듯, 아니 만취한 듯 허둥대고 있습니다 폐금廢金도 금이라서 반짝이는데 나이 들어 병이 나면 왜 사람은 빛이 나지 않는 걸까요 단물난 단벌의 허아비 하나 길 위에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

어린아이 -치매행致梅行 · 4 洪 海 里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다저녁때

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 洪 海 里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