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노래 - 치매행致梅行 · 33 洪 海 里 눈물로 노래를 씻어 부르면 노래마다 구구절절 빛이 날까 눈썹 끝에 별을 달고 홀로 가는 길 별 내린 풀숲에서 실을 짜 엮고 있는 풀벌레들 계절은 가릉가릉 현악기로 울리고 달빛 타고 하늘 가득 날아가는 기러기 떼 허공중에 떠가는 수많은 섬이구나 날갯짓마다 파도가 일어 가을이 젖는데 내 저 섬을 비추는 등대라면 하늘길 안내하는 불빛이라면! - 동양일보 2022. 22. 29.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흔적 흔적 - 치매행致梅行 · 25 洪 海 里 여기저기 부딪치다 세월은 가고 뜨거웠던 피 퍼렇게 맺혀 멍한, 내 생의 하오 말간 물빛으로 하늘에 어리는 나의 그림자, 짧은 허상으로 사라질 내 삶의 흔적 하나, 하나, 지우려 잦아드는 마지막, 나의 적빈을 흔드는 아내가 늘인 흐린 그림자 하나.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손톱 깎기 손톱 깎기 - 치매행致梅行 · 5 洪 海 里 맑고 조용한 겨울날 오후 따스한 양지쪽에 나와 손톱을 깎습니다 슬며시 다가온 아내가 손을 내밉니다 손톱을 깎아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손을 내밀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겨우내 내 손톱만 열심히 잘라냈지 아내의 손을 들여다본 적이 없습니다 손곱도 없는데 휴지로 닦아내고 내민 가녀린 손가락마다 손톱이 제법 자랐습니다 손톱깎이의 날카로운 양날이 내는 금속성 똑, 똑! 소리와 함께 손톱이 잘려나갑니다 함께 산 지 마흔다섯 해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 줍니다 파르르 떠는 여린 손가락 씀벅씀벅,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집니다. -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황금마루)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짝 짝 - 치매행致梅行 · 24 洪 海 里 절망과 희망은 한집에 삽니다 슬픔과 기쁨은 같은 이름입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위아래일 뿐입니다 미움과 사랑은 본시 한 몸입니다 삶과 죽음도 한 길의 여정입니다 앞과 등이 따로 보일 뿐입니다 크게 보이고 작게 보일 따름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듯 하물며 짝이 아닌 게 없고 손바닥도 마주쳐 짝짝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아내는 지금 고장난명孤掌難鳴의 외손뼉을 치며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병원길 병원길 - 치매행致梅行 · 17 洪 海 里 아내랑 병원에 갑니다 어디 가느냐 열 번을 묻습니다 왜 가느냐고 또 묻고 묻습니다 그 물음을 나는 가슴에 묻습니다 병원에 간다 의사 만나러 간다 해도 아내는 묻고 또 묻고 그럴 때마다 나는 묻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늘대는 버들가지처럼 흔들리는 내가 바보겠지요 그래도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있어 손잡고 병원 길을 올라갑니다 인생 한 번 살았다고 인생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지나친 길이라고 다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느작아느작 흔들리며 병원으로 들어갑니다.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안개 안개 - 치매행致梅行 · 13 洪 海 里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안 보이니 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내가 없고 내게 네가 없습니다 한평생 누구에게나 가지 못한 길이 있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할 길이 있습니다 쉬운 길도 편한 길도 있었지만 먼 길을 돌아, 이제 자갈길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생각해도 길은 안개에 갇혀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듯 안개가 짙으면 길이 보이지 않아 청맹과니 하나 칠흑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낯선 길 위에서 낯선 길 위에서 - 致梅行 · 12 洪 海 里 온몸이 멍멍해집니다 온종일 막연한 불안감에 마음이 먹먹합니다 낯선 거리에 서 있는 한 사내 어디로 갈지 몰라, 홀로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취된 듯, 아니 만취한 듯 허둥대고 있습니다 폐금廢金도 금이라서 반짝이는데 나이 들어 병이 나면 왜 사람은 빛이 나지 않는 걸까요 단물난 단벌의 허아비 하나 길 위에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어느 날 문뜩 어느 날 문뜩 치매행致梅行 · 7 洪 海 里 아내 얼굴을 보지 않고 한평생 살았습니다 늘 아늠 곱고 젊을 줄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문뜩 마주친 아내 주름지고 핏기 가신 창백한 모습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아늘아늘하던 아내는 어디 가고 낯선 사람 하나 내 앞에 서 있습니다.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어린아이 어린아이 -치매행致梅行 · 4 洪 海 里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5
다저녁때 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 洪 海 里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2022.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