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2

아내새

아내새 - 치매행致梅行 · 89 洪 海 里 한평생 나는 아내의 새장이었다 아내는 조롱 속에서 평생을 노래했다 아니, 울었다 깃털은 윤기를 잃고 하나 둘 빠져나갔다 삭신은 늘 쑤시고 아파 울음꽃을 피운다 이제 새장도 낡아 삐그덕대는 사립이 그냥, 열린다 아내는 창공으로 날아갈 힘이 부친다 기력이 쇠잔한 새는 조롱조롱 새장 안을 서성일 따름 붉게 지는 노을을 울고 있다 담방담방 물 위를 뛰어가는 돌처럼 온몸으로 물수제비뜨듯 신선한 아침을 노래하던 새는 겨울밤 깊은 잠을 비단실로 깁고 있다 노래도 재우고 울음도 잠재울 서서한 눈발이 한 생生을 휘갑치고 있다.

집사람

집사람 - 치매행致梅行 · 86 洪 海 里 집은 그런 것이었다 아픔이라고 또는 슬픔이라고 무슨 말을 할까 속으로나 삭이고 삭이면서 겉으로 슬쩍 금이나 하나 그었을 것이다 곡절이란 말이 다 품고 있겠는가 한이 많다고 뭐라 했겠는가 즐겁고 기쁘다고 춤을 추었겠는가 슬프고 외로웠던 마음이 창문을 흐리고 허허롭던 바깥마음은 또 한 번 벽으로 굳었을 것이다 아내는 한 채의 집이었다 한평생 나를 품어준 집이었다.

그믐달

그믐달-  치매행致梅行 · 95 洪 海 里 가을이라고술 취한 사내밤 늦어 홀로 돌아올 때휘청거릴까 봐넌지시내려다보고 있는나이 든 아내젖은 눈빛. * 홍해리 시인께서 보내주신 시집 『치매행致梅行』에 실려 있는 “그믐달”이라는 시다. 치매에 든 아내를 보살피는 선생님의 애정 어린 노고가 너무도 생생하여 월간 「우리詩」에 연재되는 그분의 시들을 읽고 또 읽어온 터다. 시를 짓는 벗들과 어울려 약주 한잔 하고 밤늦게 귀가하더라도 선생님을 기다리던 아내의 간절하던 눈빛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당신 눈이 저절로 젖어가는 심경이 느껴진다. 가을타는 모든 남정들이 그렇겠지만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린 아내를 보살피고 있는 한 노시인의 외로움이 가슴에 와 닿는다. - 전순란 / 『에큐메니안』  2015년 10월 13일 화요..

아침 풍경

아침 풍경 -치매행致梅行 · 81 洪 海 里 왜 가야 되는데, 응? 몇 시에 가는데, 응? 아내는 묻고 또 묻길 몇 차례 9시면 차가 와 아내를 모셔갑니다 오후 5시 반이면 되모시고 옵니다 그 사이 시간이 내 것이 되었습니다 있는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면서도 속이 아픕니다 까맣습니다 우두커니 서서 망망한 바다를 바라다봅니다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바다가 다 말라버립니다 망연茫然해서 문치적문치적하다 자실自失해서 멍하니 쳐다봅니다 왜 가야 하는데? 몇 시에 가는데? 가야 하는 데가 어딘 줄도 모르고 왜 가는지도 모른 채 아내는 차를 탑니다.

아내는 부자

아내는 부자-치매행致梅行 · 78 洪 海 里  나는 평생 비운다면서도비우지 못하고 살았습니다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버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다 내려놓자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습니다버린다 비운다는 말 한마디 없이내려놓는다는 말도 없이아내는 다 버리고 비웠습니다다 내려놓고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부자가 되었습니다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천하태평입니다먹는 것도 입는 것도 걱정이 없습니다집 걱정 자식 걱정도 없습니다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아내는천하제일의 부자입니다. * 사족 살면서 비우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듣고 삽니다. 머리는 알고 있는데 도무지 실천이 어려운 비워내기는 결국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하고서야 자의가 아닌 방법으로 실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부자..

탓 - 치매행致梅行 · 80 洪 海 里 난蘭 찾아다니느라 늘 집을 비웠으니 아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난에게 남편 빼앗긴 주말과부의 가슴이 얼마나 시렸을까 친구들과 술 마시고 자정에야 돌아와 새벽이면 빠져나가고 밤이면 다시 취해 기어서 들어왔으니 술에 익사한 남편을 건사하는 아내 사는 게 어디 사는 일이었겠습니까 시 쓴답시고 밤낮 시詩답지도 않은 걸 끼적거리며 시 쓰는 친구들 불러내 술이나 마셔 댔으니 시에게 남편을 내주고 술에게 빼앗기고 아내는 모든 걸 놓았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바로 내 탓, 내 탓입니다!

꽃은 왜 지는가

꽃은 왜 지는가 - 치매행致梅行 · 72 洪 海 里 소녀의 손가락에 나비 한 마리 내려앉았습니다 금빛 나비 여린 날개로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금세 나비는 날아가 버리고 꽃은 덧없이 져 버렸습니다 꽃처럼 지는 것이 어디 있는가 묻습니다 꽃은 지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꽃이 왜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왜 하염없이 지고 마는지 더더욱 모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합니다 덧없어서 애틋하다고 합니다 하염없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슴에 새겨 주고 꽃은 지고 맙니다 절로 피는 꽃이 금세 어두워지듯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늘도 찬바람 부는 벌판으로 나갑니다.

꿈길에 서서

꿈길에 서서 - 치매행致梅行 · 21 洪 海 里 걸어서 갈 수 없어 아름다운 길 눈부터 취해 가슴까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도 갈 수 없는 길 안개 속으로 구름 속으로 헤매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입술로 가슴으로도 못 가는 길 가까워도 멀기만 해 어둠 속 둥둥 떠 있었습니다 내 생生의 이물과 고물 사이 가지 못할 길 위로 그리움은 다리를 절며 절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가는 길은 가지 말아야 할 길 그 길을 아내가 홀로 가고 있습니다. - 동양일보 2022. 05. 26.

팔베개

팔베개 - 치매행致梅行 · 65 洪 海 里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한 슬픔의 어깨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 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마른 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니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도 금세 잠 속으로 잠수하고 맙니다 생生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다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린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 서울경제 / 2015. 11. 11. 솜베개, 나무베개, 보약베개 다 베어봤지만 세상 시름 잊게 하는 것은 오직 팔베개입니다. 당신 품에 들면 다 식은 슬픔조차 따뜻해져서 공연히 마른눈물 부비며 어깨를 들썩여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