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집사람

집사람 - 치매행致梅行 · 86 洪 海 里 집은 그런 것이었다 아픔이라고 또는 슬픔이라고 무슨 말을 할까 속으로나 삭이고 삭이면서 겉으로 슬쩍 금이나 하나 그었을 것이다 곡절이란 말이 다 품고 있겠는가 한이 많다고 뭐라 했겠는가 즐겁고 기쁘다고 춤을 추었겠는가 슬프고 외로웠던 마음이 창문을 흐리고 허허롭던 바깥마음은 또 한 번 벽으로 굳었을 것이다 아내는 한 채의 집이었다 한평생 나를 품어준 집이었다.

아침 풍경

아침 풍경 -치매행致梅行 · 81 洪 海 里 왜 가야 되는데, 응? 몇 시에 가는데, 응? 아내는 묻고 또 묻길 몇 차례 9시면 차가 와 아내를 모셔갑니다 오후 5시 반이면 되모시고 옵니다 그 사이 시간이 내 것이 되었습니다 있는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면서도 속이 아픕니다 까맣습니다 우두커니 서서 망망한 바다를 바라다봅니다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바다가 다 말라버립니다 망연茫然해서 문치적문치적하다 자실自失해서 멍하니 쳐다봅니다 왜 가야 하는데? 몇 시에 가는데? 가야 하는 데가 어딘 줄도 모르고 왜 가는지도 모른 채 아내는 차를 탑니다.

아내는 부자

아내는 부자 -치매행致梅行 · 78 洪 海 里 나는 평생 비운다면서도 비우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 버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내려놓자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버린다 비운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내려놓는다는 말도 없이 아내는 다 버리고 비웠습니다 다 내려놓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 천하태평입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걱정이 없습니다 집 걱정 자식 걱정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아내는 천하제일의 부자입니다.

탓 - 치매행致梅行 · 80 洪 海 里 난蘭 찾아다니느라 늘 집을 비웠으니 아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난에게 남편 빼앗긴 주말과부의 가슴이 얼마나 시렸을까 친구들과 술 마시고 자정에야 돌아와 새벽이면 빠져나가고 밤이면 다시 취해 기어서 들어왔으니 술에 익사한 남편을 건사하는 아내 사는 게 어디 사는 일이었겠습니까 시 쓴답시고 밤낮 시詩답지도 않은 걸 끼적거리며 시 쓰는 친구들 불러내 술이나 마셔 댔으니 시에게 남편을 내주고 술에게 빼앗기고 아내는 모든 걸 놓았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바로 내 탓, 내 탓입니다!

꽃은 왜 지는가

꽃은 왜 지는가 - 치매행致梅行 · 72 洪 海 里 소녀의 손가락에 나비 한 마리 내려앉았습니다 금빛 나비 여린 날개로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금세 나비는 날아가 버리고 꽃은 덧없이 져 버렸습니다 꽃처럼 지는 것이 어디 있는가 묻습니다 꽃은 지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꽃이 왜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왜 하염없이 지고 마는지 더더욱 모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합니다 덧없어서 애틋하다고 합니다 하염없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슴에 새겨 주고 꽃은 지고 맙니다 절로 피는 꽃이 금세 어두워지듯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늘도 찬바람 부는 벌판으로 나갑니다.

꿈길에 서서

꿈길에 서서 - 치매행致梅行 · 21 洪 海 里 걸어서 갈 수 없어 아름다운 길 눈부터 취해 가슴까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도 갈 수 없는 길 안개 속으로 구름 속으로 헤매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입술로 가슴으로도 못 가는 길 가까워도 멀기만 해 어둠 속 둥둥 떠 있었습니다 내 생生의 이물과 고물 사이 가지 못할 길 위로 그리움은 다리를 절며 절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가는 길은 가지 말아야 할 길 그 길을 아내가 홀로 가고 있습니다. - 동양일보 2022. 05. 26.

팔베개

팔베개 - 치매행致梅行 · 65 洪 海 里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한 슬픔의 어깨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 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마른 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니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도 금세 잠 속으로 잠수하고 맙니다 생生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다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린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 서울경제 / 2015. 11. 11. 솜베개, 나무베개, 보약베개 다 베어봤지만 세상 시름 잊게 하는 것은 오직 팔베개입니다. 당신 품에 들면 다 식은 슬픔조차 따뜻해져서 공연히 마른눈물 부비며 어깨를 들썩여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