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매화에 이르는 길』(2017)

정월 대보름 - 치매행致梅行 · 216

洪 海 里 2017. 3. 3. 05:22

 * http://blog.daum.net/ch66da에서 옮김.



정월 대보름

- 치매행致梅行 · 216


洪 海 里




이승에서 마지막 산책을 하신 날

정월 열엿새였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대보름이면

우주 산책 중

아버지는 등불을 휘영청 밝혀

지상을 잔잔한 꽃밭으로 만들어 놓고

달빛 날개를 타고 지구로 오십니다

어쩌다 달이 뜨지 않을 때면

백매白梅 암향暗香처럼 세상이 더 은은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환하고

들리지 않아도 아버지는 그곳에 계십니다

평생 잰걸음을 하지 않던 걸음걸이

그대로 지상에 내려오셔서

나이 든 자식을 위해 등불을 켜십니다

한 등 한 등 밝힐 때마다

매화꽃 한 송이씩 피어나는데

오곡밥 나물 반찬 귀밝이술 부럼깨기

더위팔기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연날리기

어느 한 가지도 준비 못하고

상원上元을 맞이합니다

아버지,

못난 자식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 시집『매화에 이르는 길』(2017. 도서출판 움)



* 2018. 3. 2. 동아일보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신나는 쥐불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