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2019. 10. 3. 06:48

* 부산시청 26층 건물중 12~13층 동쪽외벽에 내건 27m x 8m(65평) 크기의 '문화글판'    2012년 9월 15일부터 12월 14일까지 3개월간 게시.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 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마음을 버리면 스스로 빛이 납니다

옛날 어떤 올곧은 분이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 하여 귀를 씻고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 오지요. 사실 시끄러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눈 감고 귀 막고 사는 것도 한 좋은 방법이라고 할 겁니다. 그렇지만 산다는 게 어디 그리 뜻대로만 되는가요. 눈 감아도 귀 막아도 들려올 건 다 들려오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가지 묘책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미움을 모두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고, 다시 가슴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새 마음이 샘물처럼 초록초록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보다 자연이 더 지혜롭다는 것을 깨닫곤 합니다. 저 가을 들녘을 보십시오. 한 해 동안 열심히 땀 흘리다가 풍요로운 가을걷이 끝내고 나면, 그냥 그렇게 무심한 마음으로 겨우내 자신을 텅 비워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연은 우리들에게 큰 스승일 수밖에요.
  우리도 더 가을 들녘의 자세와 마음을 배워야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위해, 또한 이웃을 위해 노력하면서 마음속에 부질없는 생각들을 비워야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눈물겨운 마음자리가 오히려 스스로 빛나지 않겠습니까?
   - 김재홍(문학평론가)

 

 

   우언(寓言)과 비유들로 가득 찬 장자의 글이 흥미진진한 콩트집 혹은 산문집이라 한다면,『도덕경』5천자로 집약된 노자의 글은 대부분이 내재하는 운율을 느낄 수 있는 사언절구(四言絶句) 시문이라 볼 수 있다. 형식이야 다르지만 200년 내외의 시간차를 두고 쓰여진 두 책은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달관한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우리 주위엔 시인도 많고 좋은 시도 많다. 요염하게 반짝이는 시가 있다면 달빛처럼 차분한 시도 있다. 거친 파도처럼 출렁이는 시가 있는가 하면 먼 산처럼 고요한 시가 있고,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시와 살을 저미는 고통스러운 시가 함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도 수시로 바뀐다. 주지적인 시와 서사적인 시가 한때의 기호물이었다면, 그리움을 노래하는 애틋한 연시에 심취되었던 것도 꽤 오랫동안이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서일까, 세상의 분주한 시보다는 인생의 정점을 넘어선 곳에 고요히 침잠하며 자연과 삶을 노래하는 선가에나 속할 시를 요즘은 더 좋아하게 되었으니, 洪海里(1942~ )의「가을 들녘에 서서」라는 시도 그 중 하나이다.

 

   * 노자가 그려주는 허정(虛靜)의 경지를 노래한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인지. 이 시에선 "오색이 사람을 눈멀게 하고 오음이 사람을 귀먹게 하며 재물이 사람을 어지럽히는[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難得之貨 令人行妨]" 혼란스러운 세상사에서 이제는 벗어나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자족할 수 있는 시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이라면 빈 그릇처럼 자신을 비우며 홀로 세상을 걸어가는 구도의 길을 자연스럽게 노래해준 이성선(1941~2001)의 시와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근수(경희사이버대 부총장)

 

* 달력을 보니 막대 두 개가 서 있다. 11월은 그렇다. 좋은 시절은 가고 춥고 황량한 들판이 앞에 가려 있다. 무언가 인간은 정리하고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 농부들은 자루에 알곡을 담고 곡간을 채우는데..., 시인은 무엇을 했던가. 손에 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빈손이다.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죽음까지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는 것도 부질없다. 무엇을 잡으려고 떠돌기만 했다. 내 자신을 찾으려고 하진 못 했던 것이다. 이런 11월이 시인 앞을 지나간다.

  홍해리 시인도 빈들에 서 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눈이 멀어야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은 세상을 보고 있으니 모두 불만스럽다는 것이다. 차라리 보지 않아야 하는데 보는 것마다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귀로 듣지 말아야 세상이 황홀하다는 것이다. 들려오는 소리마다 마음 상하고 괴롭고 그런 사회.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것 모두를 버려야 비로소 가득 찬다는 것. 다 추수해 가고 난 빈들에 서서 우두커니 뒷짐 지고 내일을 바라보는 이 시인이야말로 눈물겹지만 스스로를 만족하는 기쁨이 부럽고 빛난다.

        - 정일남(시인)

 

  * 시를 영혼의 비타민이라고 표현하면서 매일 한 알씩 비타민을 먹듯이 시 한 편씩 읽기를 권하는 한국 문단의 중진 홍해리의 `가을 들녘에 서서' 전문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욕심을 버릴수록 모든 것이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느껴진다는 사실과 이치를 추수 끝난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서 확인하고 있다.

  홍 시인의 메시지 그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로 비치면서 또 어떤 사람에게는 쓸쓸하고 황량한 조락(凋落)의 계절로 다가오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풍요롭게 바라보든, 황량하게 느끼든 가을은 깊어졌다 지나가고 어김없이 겨울로 이어진다. 가을의 한가운데서 추석을 앞두고 우려가 더 커지고 있는 신종플루의 확산 추세 역시 멈출 수밖에 없다.

 - 김종호(문화일보 논설위원)

 

   * 소순희 화백 그림 <홍해리 시인/Oil on Canvas/40.9x31.8cm>

 

  늘 시가 옆에 있었다. 이제 안다. 눈감고 걸러진 시야에 시가 보인다. 귀를 닫고 소음을 차단할 때 노래 고운 시가 들린다.
시는 다 덜어내고 비운 자리에 온다. 빈 마음에 맺힌다. 하늘을 날고 산을 넘어온 시가 가을 들녘에 앉아 당신을 기다린다.
  오늘 보이는 세상이 아름다웠다면, 웅크린 곳에서 황홀한 소리 들었다면 당신은 이제 욕심을 버린 사람이다.   다 주어서 텅 빈 들녘으로 사는 사람이다. 한 줄기 햇볕도 소중하고 한 점 바람도 간절하게 안는다. 가라앉은 낙엽 한 잎에도 눈물겹다.

   - 금강.

 

  *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반에 반도 못 보고 반에 반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잎이 무성한 계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은 모든 걸 떨구고 난 뒤에야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둥글게 보이던 나무가 예리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갖가지 형색으로 눈길을 끌던 풀꽃들이 누렇게 마를 때야 동색의 집단이었단 것도 알게 됩니다.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하면서 자연은 순환을 하지만 사람은 평생을 채우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가볍게 떠나야할 때가 왔는데도 놓지 못하고 억지 연명을 합니다. 자연의 일부라는 걸 망각한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 때문일까요.

  - 박정옥 (시인) / 경상일보 2014. 11. 13.

 

문화저널21

2019. 9. 23.

 

[이 아침의 시]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 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가을 들녘”을 천천히 걸으면 이름도 모르는 풀들이 가무레한 씨앗들을 가득 매달고 있다. 한 여름 치열했던 꽃 시절을 “다 주어버리고” 얻은 결실이기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자연은 집착하지 않는다. 순리를 따라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 스스로 알고 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왜 집착할까? 아마도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집착할 만큼 좋은 것이거나,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거나, 집착하면 그럴만한 혜택이나 보탬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에 집착하는 심리 속에는 낮은 자존감을 보상 받고 싶거나, 불안이나 수치심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방편이거나, 상처받은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이 내포 되어 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아무리 집착해도 자신의 낮은 자존감은 치유되지 않으며, 불안도 수치심도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연민은 방어기제인 자기 합리화(rationalization)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되어 결국엔 무기력증, 신경증,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집착은 우리 삶을 제 자리 걸음하게 하거나 퇴보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집착했던 것들도 언젠가는 변질되고 소멸되어 없어진다. ‘사람이 재물과 색(色)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마치 칼날에 묻은 꿀을 탐하는 것과 같다. 한 번 입에 댈 것도 못되는데 그것을 핧다가 혀를 상한다’ 고 했다. 집착 때문에 ‘마음도 한자리에 못 있는 날’ 천천히 가을 들녘을 걸어볼 일이다. 풀씨를 가득 매달고 있는 저 풀들도 겨울이 오기 전, 흙에게 풀씨를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는 ‘텅 빈 충만’으로 가득할 것이다. 

 

  -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 위의 시를 읽으면 가슴으로 전도되는 감흥에 가슴이 찡-하다. 작가가 뿜어내는 설법이 가슴 가득 담겨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선정에 든 듯 그 정경情景이 해탈의 경지이다. 텅 빈 들녘이 눈물겨운 마음자리인 것을 저 시가 아니면 어떻게 마음에 담으리오. 작가가 내통하는 정과 시상詩想에 독자도 함께 빠져들어 시정詩情의 경지를 함께 체험한다. 짧은 문장의 평범한 시어이지만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정취情趣에 빨려들어 시심으로 몸을 씻고 오욕을 떨쳐내는 환상 속에서 새로운 자기상을 발견하게 된다. 압축된 이미지를 통해 다양하고 정겨운 사색의 광장을 함께 대면하는 듯 시인의 세상을 독자에게 내어준다.
 - 이재부(시인)

 

   * 이 한 편의 주옥 같은 시는 홍해리 시인이 2008년 10월 24일 펴내신 시집『비타민 詩』66쪽에 실려 있는 詩이다.
         홍해리 시인은 이 시집『비타민 詩』를 펴 내시면서
         "우리는 자연으로 가야 합니다. 시는 우리 영혼의 비타민, 자연이 되기까지 하루 한 알이면 충분합니다.
             비타민 시를 복용합시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자연 속에서 생명의 시를 가꾸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삶의 노래며 자연의 도저한 신비에 대한 아름다운 찬미며
             또한 우리가 꿈꾸는 맑은 영혼의 안식처다.
             시가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기약하며 인간성 회복을 모색하는 고매한 시정신!
             이것은 시가 우리들에게 주는 구원이며 위안이다.

             가치관의 인식과 의식이 혼탁한 이 세상에서 시의 구원적인 기능으로    
             참다운 인간성의 회복과 순화되는 감정과 감수성으로 아름답고 긍적적인 상생이 소통하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이상의 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현실에서 나는 홍해리 시인이 권장하는 '비타민 詩' 한 알씩 솔직히 매일은 아니어도
             아픈 증상(?)이 올 때마다 복용하고 나면 확실히 효험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한번 복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허튼소리가 아닙니다.

             회갑 진갑, 지나, 나이가 점점 들어서인지 인생의 깊이를 조용히 관조하면서 절간(寺) 같은 우이동 '洗蘭靜舍'에서 맑은 사유와 의식을 정리해 보는 지성과 교양의 무게로 다듬어 만들어 내는 자연과 삶을 노래하는 홍해리 시인의「가을 들녘에 서서」같은 시를 깊이있게 애독하게 된다.

             좋은 시를 안정된 마음으로 읽으면 성에 낀 마음이 맑아지면서 '비타민' 약발이 잘 듣는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독(毒)이 되는 시나 글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약이 되는 시를 골라 읽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무수한 시인들 가운데, 제법 명성을 날리고 있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거리가 먼 시인들이나
                 시인 같지 않은 시인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살아오고 있기에
                 내가 일러 좋은 시인, 시인다운 시인으로 존경하는 시인은 불과 몇 사람에 국한되고 있다.
                 그 가운데 으뜸이 바로 홍해리 시인이다.
                 그래서 나는 홍해리 시인의 시를 줄창 읽는 영원한 독자가 되었다.
                 좋은 시는 반드시 명성잇는 시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 보다 우선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비록 문반에서 이름 석자는 생소하지만 좋은 시를 찾아 읽다가 시인다운 시인을 만나면 행복해 진다.
                 그레서 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일정한 표준과정을 거쳐서 발표되는 '우리詩'의 독자가 되었다.
                 마음 놓고 읽어도 좋다는 믿음 때문이다.

                 청각기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장애를 겪고 있지만, 그래도 내 귀북을 줄창 울리고 있는 홍해리 시인의 시의 힘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할 수만 있다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처럼 이 분의 좋은 시를 '오스트라콘(Ostracon)'에 새겨
좋은 시가 감응하는 문화적인 흔적으로 영원히 남기고 싶다.
                       - 손소운孫素雲(시인)

  

 

 * 부산시청 26층 건물중 12~13층 동쪽외벽에 내건 27m x 8m(65평) 크기의 '문화글판'                                   2012년 9월 15일부터 12월 14일까지 3개월간 게시.

 

 * 연암 선생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눈과 귀만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병이 된다고 했다. 외물(外物)에 현혹되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인간은 보고 싶은 걸 보고, 듣고 싶은 걸 듣는다는 이야기도 부정하긴 어렵다.

  눈과 귀는 선입견과 오류의 온상인 데다 욕망이 들어오는 창구이기도 하니 시인의 말처럼 “눈멀고”, “귀먹으면” 어떨까 싶다. 눈과 귀를 통해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겠지만, 마음에 따라 눈과 귀를 보완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절실한 일이지만 시인은 그 마음마저 버리라고 한다. 집착하는 마음, 소유하려는 마음,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의미로 와 닿는다.

  “텅 빈 들녘”은 시인이 지향하는 마음자리다. 다 버리고, 다 주어버리고, 눈과 귀가 방해되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 있고 싶은 거다.

   - 이동훈(시인)

 

[이근수의 무용평론] / 서울문화투데이 2018. 10. 22.


국수호의 춤 ‘무위無爲
 
2018년 10월 22일 (월) 16:58:08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sctoday@hanmail.net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의 무위(無爲)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해탈(解脫)과 통한다. 자연의 본질을 깨달아야 무위의 경지에 이르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을 깨치는 것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곧 자연의 산물이며 자연의 일부란 자각이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염담허정(恬淡虛靜)을 가능케 한다. 국수호가 55년 춤 인생을 ‘무위’(9.19~20)에 담아 아르코소극장 작은 무대에 펼쳐놓았다. 
무대 중앙에 커다란 원(圓)이 그려져 있다. 원은 우주이며 삶의 원형이다. 원 주위를 돌아가며 누런 볍씨들이 뿌려져 있다. 의자들도 주변에 자리를 차지하고 놓여 있다. 상하의를 초록색으로 통일한 여인네와 남정네들이 걸어 나오며 그 주위를 돌기 시작한다. 눈을 감은 듯 무아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그네들의 춤사위는 자연과 하늘의 기운을 상징한다. 이 기운이 모여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이 도가의 생명설이다.
  맨 앞에 서서 무리를 이끌던 장혜림이 원 안으로 들어와 춤추기 시작한다. 자리에 앉아있던 무용수들이 따라 들어와 속을 채운다. 마을 축제처럼 춤은 활기를 띄며 원 안에 또 하나의 원을 만든다. 강강수월래를 떠올리는 모양새다. 무리 중에서 선택된 조재혁이 장혜림과 짝을 이루며 음양의 교합을 예고한다.
  객석 앞자리에서 국수호가 소리 없이 무대로 나아온다. 국수호는 흙의 신이다. 한 움큼씩 볍씨를 집어 들어 대지 위에 흩뿌리기 시작한다. 군무진도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둘씩 짝을 이룬다. 흙의 신이 짝을 이룬 남녀를 축복하고 남녀 간의 교합이 이루어진다. 대지가 볍씨를 싹틔워 이삭을 맺는 것처럼 사람도 생명을 잉태한다.
  어머니의 다리 밑을 통과해서 세상으로 나아오는 탄생의식이 펼쳐진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초록색 옷이 벗겨지고 그 안에 황토색 옷이 드러난다. 황토색은 영글어진 벼이삭이고 새로 태어난 아기의 피부색이다.
  무대 양 쪽에 소리꾼이 앉아 있다. 땅의 소리(이소연)와 하늘의 소리(김준수)가 춤꾼들과 어울리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음악 역시 국악과 양악이 섞인다. 피아노(강상구), 첼로(유하나루)와 나란히 놓인 아쟁, 칠현금, 생황과 함께 유경화의 타악기도 섞여 동서양 소리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소극장 무대는 국수호에게 생소한 자리다. ‘한국천년의 춤 시리즈’, ‘Korean Drum’, ‘용호상박’ 등 그의 대표작들은 모두 대극장이 무대였다.
  춤 50년을 결산하는 무대였던 ‘춤의 귀환’(2014, 아르코대극장)을 보고 나는 이렇게 썼다. “무대가 떠나갈 듯 객석을 압도하는 그의 에너지를 능가할 무용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변신이다. 넘치는 힘과 끼를 과시하던 과거의 춤과 다른 새로운 미학이 그곳에 있었다. 힘과 끼를 바탕으로 50년 춤의 연륜이 가미된 비움의 정서가 국수호 춤에서 새롭게 발견한 미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5년 국수호는 소극장무대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과 하나 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준다. 그가 이제 다시 본래의 춤 자리로 돌아왔다는 의미일까. 홍해리의 시 한 편이 생각나는 무위의 춤이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 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 젖은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수호가 그려낸 무위세계엔 생명의 탄생과 번식, 농사의 파종과 수확, 음양의 만남과 소리의 조화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無爲)’ 속에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무불위(無不爲)’가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일까.
그가 농고 토목과에서 습득했다는 거리와 공간에 대한 개념이  대극장 무대보다 소극장에서 더욱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어본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곳이 소극장무대이다. 종심(從心)의 나이 70을 맞는 연대이기에 그에게 품어보는 바람이다.  

                                    -서울문화투데이 2018.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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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고마비(天高馬肥)란 말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당(唐)나라의 시인(詩人) 두심언(杜審言:두보杜甫의 조부)이 흉노족을 막기 위해 북쪽 변경으로 출정하는 친구 소미도(蘇味道)에게 한편의 시를 써 주었습니다.

  “雲淨妖星落(구름은 맑고 요성(妖星)도 사라져)/ 秋高塞馬肥(가을은 높고 요새의 말도 살찐다)/ 據鞍雄劍動(안장을 기대면 영웅의 칼이 움직이고)/要 筆羽書飛(붓을 휘두르면 긴 꽃은 글이 나른다.)"

  이 시는 소미도가 어서 개선해 오기를 염원하는 뜻을 담은 시인데 이 시 ‘추고마비가’ 天高馬肥(천고마비)로 바뀌었습니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중국을 가장 괴롭혔던 이민족은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이었습니다.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도 그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것은 공포의 계절이 아니라 문화의 계절,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 서정의 계절 입니다. 낙엽은 뒹굴고, 온 천지는 오색으로 물들었습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세상 한 가운데 자유인으로 서 있고 싶습니다.
  - 김영수(국제로타리 3680지구 사무국장)
                      * 출처 : 굿모닝충청(
http://www.goodmorningcc.com(201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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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 서서 / 洪海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 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푸른 느낌표!』 (2006년. 우리글)

사람들은 말을 안 해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는 것에서 모든 욕망이 꿈틀대고 갈등으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하여 모든 성인들은 이 보고 듣는 마음의 형상을 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육신을 걸치고 이 땅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여 전전긍긍,
고통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끊임없이 죽비로 내려치는 스승이 있어 그나마 어리석음에서 깨우치는 사람이 있으니
이를 일러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깨우친 사람이고 깨우친 사람은 시인이 된다고 합니다.
시인이 모두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님은 당연히 시인이 된다고 합니다.
- 출처:「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 강신주 지음

홍해리 시인!
그분은 천생 시인입니다. 당연히 부처님을 지향하는 수도자 같습니다.
백운대가 바라보이는 세란헌 서재에서 매일 새벽 3시에 깨어나는 노시인!                
달빛이 비치는 새벽에 홀로 흰 백지 위에 써 놓는 한 편의 시!
그것은 수도자의 선시입니다.
“가을 들녘에 서서”, 이 시 또한 수많은 시간 동안 마음과 눈을 갈고 닦아
얻은 귀한 오도송이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깨달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나를 옭아매는 모든 것에서 해탈하고 자유로운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시인은 내게 알려줍니다.
그 길은 눈 감고, 귀 닫고, 마음 버리면 얻을 수 있나니,
그때에야 머무르는 어느 곳에서든지 진실한 사람이 되어 스스로 빛이 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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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는 시 한 편을 남기려는 것이 어찌 욕심이겠습니까?
당연한 바람이고 참시인이라면 세상에 감동을 주는 시를 남기고 가셔야지요.
하여 남은 시간에도 갈고 닦아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시를 써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욕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좋은 시 한 편을 남기겠다”는
순박한 뜻조차 버릴 때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다가 죽은 노스님, 육신을 불태우고 모두 사라졌을 때
시자들이 불 속에서 찾아 낸 영롱한 사리, 그것이 바로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선생님의 대표시를 찾는다면 “가을 들녘에 서서”도 참 좋지만 나는
“꽃”詩도 참 좋은 시라고 봅니다.

꽃                

이승의 꽃봉오린 하느님의 시한폭탄

때가 되면 절로 터져 세상 밝히고

눈뜬 이들의 먼눈을 다시 띄워서

저승까지 길 비추는 이승의 등불.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꽃”시야 말로 감동을 주지 않을까요?
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길입니다!
꽃! 저승 길 비추는 등불이라니....
놀라운 싯귀입니다.
아울러 그동안 써 오신 여러 시편들과 “치매행” 시편 속에
선생님의 대표작이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한참 지난 후에야 사람들이 선생님의 분신인 “사리”를 찾아낼 것입니다.
선생님!
건필하시고 늘 평안하시기 빕니다.

 - 道隱 정진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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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kaostory '웃는 하루 by 미소'에서 옮김.(2019. 12. 02.)

 

 

 

 

* 간결하고 담백한 선풍의 시다. 이 시의 서두를 의미상으로 풀어보면 '눈먼 자에게는

모두 아름답게 보이고 귀먹은 자에게는 모두 황홀하게 들린다'가 된다. 마음의 눈,

마음의 귀는 잡다한 현실이 아닌 본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처럼

"마음 버리면"(현상의 탐욕을 내려놓으면) 텅 빈 마음이 되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충만한 행복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을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라고 하여 불교적인 깨달음을 지향한다.

사실 우리가 괴로움이라도 말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그것을 마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생각(마음)을 내려놓으면 고충도 사라진다. 할 일을 

다 마치고 텅 빈 가을 들판에서 얻은 성찰이다. 이처럼 시인의 관점에 따라 눈에 보이는

현상을 통해 내면의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것은 시가 지닌 성찰의 힘 덕분이다.

- 기청(시인 · 문화평론가)

- 월간 《문학공간》 2022. 10월호 「詩가 있는 산문 18」.

 

 

 

“눈멀면/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귀먹으면/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마음 버리면/모든 것이 가득하니//다 주어 버리고/텅 빈 들녘에 서면//눈물겨운 마음자리도/스스로 빛이 나네” (홍해리 ‘가을 들녘에서 서서’)

버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요? 말이야 쉽게쉽게 건네지만 정작 버려야 할 때는 이것저것 걸리지 않는 게 없고, 모두 알토란같은 소중한 것이 되는 것이지요.

남들에게 비웠다고 존경 받고 싶은 것은 눈먼 내 생각일 뿐이지요. 아무리 정장을 해도 풍찬노숙의 방랑자만도 못한 것은 모두 버리지 못하고 몇 가닥이라도 붙잡고 있는 욕심 때문이지요.

그게 인생이라고만 푸념으로 넘기지 않을 수 없지만, 버리고 가득한 가슴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쁜 일상에서 잠간만이라도 해지는 들녘에서 뽐내는 가을을 만져보면서 그렇고 그런 삶을 다리미질 해 보면 어떨런지요.
- 중도일보(www.joongdo.co.kr) 2007.09.18. / {김영수의 시}

* 이승만 시인의 페북에서 옮김. 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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