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명자꽃

洪 海 里 2022. 10. 11. 17:29

꽃향시향 《춤》 2022. 10. 11.

  명자꽃

박제영(시인, 월간 《太白》 편집장

 

* 운수재에 찾아온 명자 아씨.(2024.04,08.)

 

명자꽃, 봄꽃 중에서 붉은 꽃을 고르라 하면 명자꽃이지요. 봄날 붉은 저것이 동백인가 싶기도 하고, 홍매화인가 싶기도 한데, 실은 명자꽃이지요. 흔하디 흔해서 ‘아무개’ 대신 써도 될 것 같은 이름, 명자. 명자꽃은 서럽게 붉지요. 오늘은 그 명자를 불러봅니다. 자료를 검색하다보니 눈에 띈 기사가 있어서, 그 기사를 쓴 이가 또 친한 선배이기도 해서, 전문을 옮깁니다. 2016년 3월26일 토요일 자 「강원도민일보」에 실린 강병로 논설위원의 칼럼입니다.

담장너머 명자나무에서 봄을 찾다 문득 떠오른 시 한 편.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다. 시를 읊조릴수록 마음이 무겁다. 세상이 그렇게 만든 탓일 게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암송이 끝나기도 전에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가 떠오르고, ‘귀향’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뒤이어 독도와 일본 역사교과서가 줄줄이 딸려 나온다. 바라본 건 명자나문데 이 많은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스토리로 엮이는 이유가 뭘까.

힘들여 지키고 가꾼 그 무엇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까닭이다. 명자가 아끼꼬로, 독도가 다께시마로, 우리 땅이 일본 땅으로 바뀌어도 너무나 둔감한 탓이다. 붉은 명자꽃을 홍매로 우기는 것과 뭐가 다를까. 명자꽃이 피는 봄, 일본 역사교과서는 일제히 ‘다께시마(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기술했다. 지난 1992년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로 심난했고, 2016년 조정래 감독의 ‘귀향’으로 눈시울을 붉혔던 많은 ‘한국인들’이 뒤통수를 세게 맞은 꼴이다. 도대체 우리 정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자나무는 집안에서 내쫓길 운명을 타고 났다. 흐드러진 꽃이 하도 예뻐 아녀자들이 넋을 잃는다 했던가. 그런 이유로 담장너머 한갓진 곳에 버려진 듯 심긴 나무가 명자나무다. 버려진(?) 나무답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잔가지를 날카로운 가시로 탈바꿈시킨다. 홍자색과 흰색으로 피는 꽃이 빼어나게 아름답지만 꽃말은 소박하다. 내쫓긴 꽃답지 않게 ‘평범, 신뢰, 겸손’이라는 꽃말을 지녔다. 그러나 김지미 주연의 ‘명자 아끼꼬 쏘냐’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뒤 명자꽃은 비련의 조선 여인으로 환치됐다. 나라 없는 여인으로.

명자나무 꽃 몽우리가 터질 듯 부풀었다. 그러나 시인이 간파했듯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일 것이다. 그래서 꼭 기억해야 한다. 미래 일본 세대들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굳게 믿는다는 사실을. 검정을 통과한 일본 교과서 10권 중 8권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이 실렸다. 아베정부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태연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이건 아니다. 명자꽃을 홍매, 동백이라고 우길 수 없는 것처럼.

지난번 유채꽃 사연을 올리면서 한번 소개했더랬지요. 「애월, 독한년」이라는 졸시.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명자꽃보다 먼저 알았던 명자라는 계집아이. 아직 꽃도 피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질고 독한, 열여덟 살 명자. 똥밭을 구른다 해도 저승보다야 이승이 낫다는데, 명자로 살든 아끼꼬로 살든 쏘냐로 살든(명자를 일본말로 아끼꼬라 하고 러시아말로 쏘냐라고 한다는 걸, 명자로 살다가 아끼꼬로 살다가 쏘냐로 살아야 했던 어떤 굴곡진 삶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떡하든 살아서 살아남아서 똥밭인들 못 구를까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 것을. 결국 제대로 독하지는 못한 그런 독한년 명자. 삼십 년도 훨씬 더 지났지만 봄날 핀 명자꽃은 아직도 꽃이 아니라 검붉은 멍입니다. 통증입니다. 얼마나 더 지나야 이 멍이 이 통증이 사라질런지요.

아비 없이 태어난 명자는 열여덟 살 꽃 같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간장을 먹고 절벽을 구르고 약도 먹고 별의별짓을 다했는데 죽지도 않더라 독한년, 독한년, 술에 취한 날이면 어미는 독한년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식구들 모두 빨갱이로 몰려 죽고 혼자 남은 어미가 어찌 살았는지 아니까 어미도 스스로 징한년이 되어 살아남은 것을 너무 잘 아니까 원망은 없다 했습니다

먼 남쪽 바다, 涯月의 석양이 왜 핏빛이 되었는지 알려주었던, 박용래와 이용악과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사랑했던, 애월의 모래밭에서 조르바와 춤을 추길 좋아했던, 마침내 애월에 몸을 던져버린 독한년, 열여덟 살 명자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먼 훗날 어느 가을 호젓한 오솔길을 홀로 걸을 때 혹여 코스모스 피었거든, 그 붉은 잎에 박용래의 코스모스 한 구절 적어 바람에 날려 보내주면 그것으로 좋겠다던, 독한년 명자, 삼십 년 전 명자가 문득 붉어지는 가을이 있습니다
- 박제영, 「애월, 독한년」 전문

위의 강병로 논설위원의 글에도 나와 있지만, 명자꽃은 집 안에 심지 않았습니다. 집의 아녀자가 명자꽃을 보면 바람이 난다고 하여 집 안에 심지 못하게 한 것이랍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이지요. 경기도에서는 아가씨꽃, 애기씨꽃이라고 부르고, 전라도에서는 산당화라고 부른다지요. 아참, ‘붉은 명자 붉은 명자’ 해서 명자꽃이 붉은 꽃만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희디 흰 명자도 있으니까요. 희붉은 명자도 있고요. 물론 어떤 색이든 명자는 사람을 홀릴 만큼 예쁜 꽃입니다. 그러니 예로부터 바람난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붉은 명자를 얼핏 보면 동백과 구분이 어려운데, 사실 알고 보면 구분하기는 쉽습니다. 동백은 녹색의 잎사귀들 사이로 붉은 꽃이 피지만, 명자는 잎이 없이 꽃만 다닥다닥 피는 까닭입니다. 동백은 꽃잎이 5~7장으로 벌려 피는데, 명자는 오직 5장이 오므려 피는 까닭입니다.

내 남편의 첫사랑은
명자, 명자나무
갈비뼈 사이 어디쯤에서
아직도 나붓거리고 있을
붉은 꽃잎의 기억
왠지 심술 나
모른 척 툭 건드리면
“그거이 왜 자꾸 건드립네까”
괜스레 장난스런 말투로
슬쩍 감추어 버리는
아내인 나도 모르게
꼭꼭 숨겨 놓은
여자
명자나무 한 그루
푸드득 바람이 깃을 세우면
내 마음 쫑긋이 귀를 세우는
- 이영혜, 「꽃잎의 기억」 전문

실제로 시인의 남편에게 첫사랑이 있고, 그 첫사랑의 이름이 명자일 수도 있겠지만, 아니어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내 생애 가장 붉고 예뻤던 시절, 화양연화의 시절은 지나고, 이제는 세월 따라 늙어가는데, 명자 저 붉은 가시내 같은 꽃을 보면 누군들 시샘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인의 마음이 지금 그럴 테지요. 그렇게 넘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는데요, 민왕기 시인의 「마리여관」이라는 시입니다.

마리여관이 서있다 아름다운 마리여관이 서있다
투숙객들 떠났다고 쓰면 더 아름다울 것 같아서
수첩에 마리여관, 마리여관, 사람 없는 마리여관이라고 써보았다
아버지에겐 명자라는 이름의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 그건 정말 슬픈 이름 같아
사람을 홀리기도 하는 퇴색한 흰 벽에 마리, 라고 써보고 싶었다
아픈 이름을 지은 여관 주인에게 할 얘기는
여관이 몰락한 후에 생겨난 이상한 아름다움 그리고
마리라는 가명을 숙박부에 적은 홀몸의 여인들이
한 사나흘 머물다 돌아가 마리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단 얘기
하지만 그녀들은 이미 백발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아마 찾을 수 없다
마리여관이 서있다 늙은 마리여관이 서있다
반지에 이름 새겨드립니다, 라고 적힌 액세서리 집을 지나
팡팡사격장을 지나 문득 어촌의 한갓진 데에
이상한 마리여관이 세계의 현을 건드리며 아름답게 피어있다
- 민왕기, 「마리여관」 전문

‘아버지에겐 명자라는 이름의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 그건 정말 슬픈 이름 같아’(민왕기, 「마리여관」)와 ‘내 남편의 첫사랑은/ 명자, 명자나무/ 갈비뼈 사이 어디쯤에서/ 아직도 나붓거리고 있을’(이영혜, 「꽃잎의 기억」) 두 문장을 놓고 보면 참 묘하지요. 두 시인이 말하는 ‘명자’는 각각 다른 명자일 텐데, 마치 세월을 두고 한 여자를 가리키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니 말입니다.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면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 홍해리, 「명자꽃」 전문

흰꽃은 흰 대로, 붉은꽃은 붉은 대로, 명자꽃은 사람 마음을 흔드는 묘한 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그 이름 때문에, 꽃보다 먼저 명자라는 그 이름 때문에 더 사람 마음을 흔들기도 하는 참 묘한 꽃이지요.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을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라는 문장만큼이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