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문학평론> 에로스, 그리고 놀이하는 시인 / 김석환(시인)

洪 海 里 2005. 11. 9. 17:07
에로스, 그리고 놀이하는 시인 
  
김석환              
          

  1. 에로스, 그 보이지 않는 흐느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다”는 프로이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 욕망, 즉 에로스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가 시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 본능적 욕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늘 새로운 지향의 대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지만 그것들이 모두 현실에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쾌락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에 도덕이나 효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현실의 규칙에 부딪혀 억압되거나 실현할 능력이나 여건이 부족할 경우 좌절될 수밖에 없다.  

  타일로 둘러쳐진 벽, 찌개가 끓고 있는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무수한 사각을 이어서 생각의 격자 틀에서 작은 틀마다 들어있는 나, 그저 한 곳으로 가고 있구나 어쩌면 편안하고 따뜻할 지도, 무거운 솜이불 덮은 꿈 없는 깊은 잠일지도, 유리냄비 속을 들여다본다 납작하게 엎드린 불꽃 위에서 감춰진 속에 것들만 발버둥치며 끓어오른다 불을 끄고 상으로 옮긴다 뚜껑이 열릴 때까지도 여전히 끓고 있는, 가장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끓고 있는, 속에 것 나
   ―윤정옥 「찌개를 끓이다」 중에서

위에서 화자는 찌개를 끓이다가 내면 깊이에 숨겨진 자신의 에로스, 즉 꿈이나 욕망을 살피며 그것이 현실을 살고 있는 나, 즉 “보여지는 나”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 시의 앞 부분에서 보이는 “비틀대며 가는 하루, 출렁다리를 건너가는 중” 등은 그 에로스의 억압과 좌절로 인한 서로 다른 ‘나’의 불일치를 암시해 준다. 그리고 ‘타일로 둘러쳐진 벽, 생각의 격자 틀, 무거운 솜이불, 유리냄비’ 등은 자신의 에로스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현실의 여러 제도나 규칙 등을 비롯한 외적인 힘이나 현실의 원리이다. 그리고 ‘납작하게 엎드린 불꽃, 감춰진 것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끓고 있는 속에 것 나’는 실현되지 못한 채 잠재된 에로스를 상징한다. 윤정옥 시인은 이처럼 외적인 힘에 의하여 억압되어 있지만 내면 깊이에서 끓고 있는 자신의 에로스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윤정옥 시인은 시 「모로 누운 여자」에서는 “유리문이 깨졌다/ 파란 플라스틱 통에서 빨간 김치가 꾸역꾸역 쏟아진다/ 도랑을 이뤄 낮은 데로 흐르는 김치 국물”이라고 숨겨져 있던 에로스가 억압하던 어떤 힘을 거부하고 외부로 발현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 시에서 빨간 김치와 그 국물은 숨겨져 있던 에로스요 유리문과 파란 김치통은 그것을 구속하는 외적인 힘이다. 이처럼 내면에 잠재된 에로스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은 자신의 참모습과 진정한 꿈을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에 독자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심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이에게는 늘 필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윤정옥 시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위의 시에서 보여 주듯 ‘보여지는 나’와 ‘유리냄비 속에 끓고 있는 김치찌개’처럼  ‘숨겨진 나’는 늘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다. 프로이드는 그럴 때 사람들은 히스테리나 고통을 느끼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심리적 방어기제를 선택하여 간접적으로 충족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김금용 시인의 다음 시 「칠월의 바이올린」은 에로스가 어떻게 심리적 고통을 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시라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가를 잘 짐작하게 한다.  

때론 바이올린 음에 칠월 폭염의 햇살이 싸늘해진다
낮게 숨죽인 흐느낌, 견디다 못해 뱉어내는 날카로운
금속성 외침, 뼈 시리도록 달콤한 체리 향내, 우울하게
퍼지는 체취, 고통스럽다 바이올린 네 가녀린 신음소리
들으면, 터져 나오지 못한 아픔 억눌린 성희가, 불붙는
목마름이, 눈감고 견뎌내는 뜨거운 공기가, 부풀어 오른
弦이, 가만히 몸 더듬으면 미세하게 출렁이는 떨림, 욕망
의 줄 끝에서 일어나는 춤사위, 네가 뱉어놓는 간헐적
사랑의 언어,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말발굽소리, 가파른
계단을 굴러 가슴속으로 떨어지는 별똥별 하나, 이내 끊어
지고 마는 바이올린 絃――――,
열린 창 너머
붉게 타오르는 칠월의 자귀나무 그녀,
                ―김금용 「칠월의 바이올린」

위의 시는 바이올린과 그 연주 행위, 그리고 음으로써 인간의 무의식 속에 저장된 에로스와 어떤 억압에 의해 느끼는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숨죽인 흐느낌, 체리 향내, 체취, 억눌린 성희, 목마름, 뜨거운 공기’ 등은 바로 그 에로스를 대신하는 이미져리이다. 그리고 ‘칠월 폭염의 햇살’은 그것을 자극하여 깨우는 외적인 힘의 상징이며, 바이올린 음은 그 자극을 받아 외부로 발현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데 참다가 울리는 그 바이올린 소리에 의해 칠월 폭염의 햇살은 오히려 싸늘해지고 만다. 따라서 햇살은 에로스를 발현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을 억압하는, 즉 이중성을 갖는 외적인 존재이다. 그 외적인 힘에 의해 욕망은 억압되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숨죽인,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오지 못한 아픔, 간헐적, 이내 끊어지고 마는’ 등의 수식어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이 지향하는 보다 높은 가치를 상징하는 별똥별이 가슴속으로 떨어져 아예 바이올린 絃이 끊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화자는 바이올린 연주, 즉 욕망의 직접적인 표출을 포기하고 그 억압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을 참으며 외부로 에로스를 발현하는 연주를 포기하지만 화자는 이미 열린 창 너머로 피어 있는 자귀나무를 발견하며 자신과 동일시한다. 붉게 타오르는 자귀나무, 즉 그 꽃은 승화된 에로스의 실체이며 고통받는 내적인 자아와 달리 현실 속에 위치한 자신의 모습을 상징한다. 따라서 에로스는 그 자귀나무가 별을 향해 자라고 타오르게 하는 근원적 생명력이며 자귀나무 꽃은 에로스에 뿌리를 두고 피는 시인의 시의 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무의식 속 깊이에서 억압된 채 뜨겁게 끓고 있는 에로스를 발견하고, 외적인 억압으로 고통을 느끼며, 그 내적 자아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현실 속에 존재해야 하는 인간 존재의 시상을 성찰하며 섬세한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시의 원천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에로스이며, 그러기에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2. 시는 놀이다

정신분석학의 태두로서 인간 내면의 깊이에 무의식, 즉 에로스의 저장고가 있음을 발견한  프로이드는 유달리 예술가들과 예술작품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술이란 바로 위의 시가 보여 주듯이 억압된 욕망이 주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요 에로스의 산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 쓰기를 포함한 여러 예술적 행위를 놀이의 일종으로 규정하고 있다. 놀이는 욕망의 좌절이나 억압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하고 심적 쾌락을 얻기 위한 여러 심리적 방어기제가 복합적으로 작용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서로 엄마나 아빠가 되고, 인형을 아가라 부르며 소꿉놀이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금파리로 솥을 만들고, 배가 고픈 인형 아가를 위해 풀로 밥을 짓고, 약국을 다녀오고, 정성스레 약을 먹이며…… 프로이드는 아이들이 그렇게 소꿉놀이를 하는 까닭 역시 어른이 되어 보고 싶은 본능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하면 창피해서 소꿉장난을 즐기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갖가지 놀이를 하며 현실 속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간접적으로 성취하며 어린 시절 느끼던 그 놀이의 즐거움 다시 맛보고 심적 안정을 찾게 된다.
시란 시인이 일상 생활에서 쓰는 언어를 사용하되 새로운 코드로 상징적 체계를 구축하여 새롭게 발견하고 추구하는 진실이나 가치를 보여주는 상상적 세계라는 면에서 그 소꿉놀이와 동일하다. 어린이들의 그 소꿉놀이는 하나의 상징적 체계이며, 그 새로운 질서 속에서 공간, 시간, 사람이나 사물들은 새로운 이름과 의미를 갖게 된다. 어린 아이가 엄마나 아빠가 되고 인형이 아가로 변용 되는데 이 변용이야말로 시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시라는 하나의 상상적 세계에는 시인이 현실에서 다 도달하지 못하고 꿈꾸는 가치가 있고 일상어와는 다른 언어적 질서, 즉 시적 문법이 있다. 서로 차이점이 있다면 소꿉놀이는 아이들이 현실에서 직접 만져 볼 수 있는 사물들을 사용하지만 시는 사물이 아닌 언어라는 기호로서 새로운 상징적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이다.

제자리서만 앞뒤로 구르는
두바퀴수레를 거느린 먹통,
먹통은 사랑이다
먹통은 먹줄을 늘여
목재나 석재 위에    
곧은 선을 꼿꼿이 박아 놓는다
사물을 사물답게 낳기 위하여
둥근 먹통은 자궁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도 어둡고
먹통도 깜깜하다
살아 있을 때는 빳빳하나
먹줄은 죽으면 곧은 직선을 남겨 놓고
다시 부드럽게 이어진 원이 된다
원은 무한 찰나의 직선인 계집이요
직선은 영원한 원인 사내다
그것도 모르는 너는 진짜 먹통이다
원은 움직임인 생명이요
또다른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직선이 된다
둥근 대나무가 곧은 화살이 되어 날아가듯
탄생의 환희는 빛이 되어 피어난다
부드러운 실줄이 머금고 있는
먹물이고 싶다, 나는.      
     ―홍해리 「먹통 사랑」      

먹통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수들의 필수품으로 나무에 홈을 파서 먹물을 넣어 실을 적셔 바퀴에 감아 두었다가 팽팽하게 풀어 직선을 긋는 데 사용하는 목공용 도구이다.  시인은 이 먹통을 사랑이라고 이름짓고 그 사용 과정으로 인간 존재의 이중적 실상과 자아와 세계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꿈을 보여 주고 있다. ‘원/직선, 빳빳함/부드러움, 계집/사내, 어둠/빛, 안/밖’ 등의 대립적 의미들이 쌍을 이루고 새로운 상징체계를 구축하며 그러한 의미들을 암시하고 있다. 먹줄을 감아 둔 바퀴가 있는 먹통의 안쪽은 그러한 구별과 대립들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식이라는 심리적 공간을 상징하고 있다. 실이 감겨 있는 먹통의 내부는 원이지만 직선을, 어둠이지만 빛을 내포하고 있고, 계집이면서 사내이고, 안이지만 밖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즉 구별과 대립 이전의 카오코스모스적 공간이요 자궁처럼 장차 생산될 생명과 언어가 내재된 침묵의 공간이다. 이 시라는 상징체계 안에서 먹통, 실, 먹물 등은 새로운 질서에 의해 변용 되며 새로운 의미나 가치를 갖게 된다. 그리고 삶의 주체인 인간, 세계, 그리고 양자의 대립과 조화, 그 사이에서 먹물이 되고 싶은 시인의 꿈을 대신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언어로써 하나의 놀이를 하며 현실 속에서 다 이루지 못한 욕망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며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시인의 날개

시를 쓴다는 것이 이처럼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놀이의 일종이란 것을 전제로 한다면 과연 누가 시를 쓰기에 적합한가. 가슴에 그 뜨거운 에로스를 많이 소유한 사람, 또는 그것을 충족하려다가 많은 좌절을 겪고 상처를 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시라는 간접적인 방식, 즉 놀이 형식을 빌어서라도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려 노력하리라 믿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슴이 차가운 사람, 자신의 욕망을 물질이나 명예 등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충족하려는 이는 시를 쓸 이유가 없을 것은 뻔한 노릇이다.
물론 물질이나 권력, 그것으로 얻어지는 명예의 유무 또는 그것을 소유한 정도가 시인이 될 자격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통속적인 가치로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길들여지거나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사람은 시라는 놀이를 즐겨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은 뻔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반적으로 한 인간의 인격이나 삶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오인되는 그 물질, 권력, 명예 등을 통속적이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그것들의 가치가 매우 순간적이요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인간이 참된 행복을 유지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를 놀이라고 단정할 때 놀이라는 개념은 적어도 화투 놀이나 컴퓨터 게임과는 다르다. 시를 놀이라고 이름을 짓는다면 시가 삶의 주체인 인간, 그리고 그 객체 또는 환경인 사회나 역사 또는 우주와 상징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 속에는 통속적인 것보다 더 높은 가치나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더 신선한 가치를 보여주고 에로스를 자극하고 깨워 주며 나아가 더 활력이 있는 삶의 길로 안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안고
땅을 업고
무한공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날아도 날아도 제자리였다

겨울이었다

꽁꽁얼어붙은세상에서시인이라는
수인번호를달고있는사람들이비명을
치고있었다바락바락발악을하고있었다
모두가꿈을꾸고있는지도모르고있었다

날개가 너무 무거웠다.
      ―홍해리 「꿈」

  홍 시인은 시인을 새로, 수인으로 변용하고, ‘하늘/땅’이라는 우주적 공간을 상/하 양극으로 대립을 시키며 새로운 상징적 체계를 구축하는 놀이를 하고 있다. 하늘을 안고 땅을 등지며 날아가는 새는 천지를 잇는 매개자로서 시인의 자세와 역할을 암시한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세상이 비생명적으로 변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세상은 시인을 오히려 죄인으로 만들고 있어 시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새가 되고자 한다. ‘날아도 날아도 제자리였다, 날개가 너무 무거웠다’는 것은 세상이 얼마나 오염이 되었으며, 그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찾아 시의 날개를 펴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암시한다. 시인은 놀이를 하되 오염된 세상을 비판하고 더 나은 세계가 있음을 제시하며 은연중에 함께 가기를 권유하고 있다.          
놀이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는 화투도 그 나름의 규칙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의 상징체계이다. 그러나 그것을 도박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삶의 상식적 질서보다도 더 저급한 규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화투라는 상징체계를 지배하는 코드는 피땀보다 요행이 더 우세하며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판쓸이와 피박이란 규칙을 지켜야 하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은 깊은 사유보다 순간적이고 즉각적 감각을 요구하며 힘이 센 파괴자가 승자가 되는 것이 지배적인 코드가 되기 때문에 시라는 놀이와는 다르다. 그래서 화투나 컴퓨터 게임이란 놀이는 오히려 새로운 생명력을 깨우기보다 참된 인간적 가치를 외면하게 하고 사유를 마비시켜 세상을 더 어둡게 하기 십상이다.
물론 시 역시 화려하고 자극적인 수사만으로 외피적 감각만을 자극하고 자아와 세계를 발견하는 맑은 거울이요 창문이 되지 못한다면 화투나 컴퓨터 게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시라는 형식을 빌어 지나친 관념어로서 지적 내용만을 단순히 전달한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관념어는 이미 구체적인 현상을 대상으로 과학적으로 추상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새롭게 에로스를 자극하지 못한다. 즉 새로운 미적 자극을 주어 독자들에게 진정한 쾌락을 주고 나아가 더 나은 세계를 제시하며 잠든 생명력을 깨우지 못하고 이미 자동화된 정보를 알려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과 세계의 새로운 상징적 체계를 만드는 하나의 놀이이다. 때로는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고 신음하던 욕망의 바이올린 줄을 끊고 창 밖에 자귀나무로 서서 붉은 꽃등을 피워 매다는 일이다. 단순한 현실의 기록을 넘어서 현재보다는 미래에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더 높은 세계, 또는 자아의 모습을 제시하며 인도해주는 빛이어야 한다. 먹통 속에 잠겨 있다가도 참다운 삶의 길은 이런 것이라고 직선을 긋는 것이다. 시인은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일상어를 변용하며 새로운 상징적 체계를 구축하는 놀이의 주체요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일상어의 문법을 파괴하는 새롭고 독자적인 언어적 질서, 즉 아이러니를 통하여 잠든 에로스를 깨우며 진정한 쾌락을 주어야 한다.

밤하늘 위로 짐승 걸어가는 울음소리
그 아래 그들 똥을 받아
시를 쓰는 시인의 방

이런 날 밤
집 근처에 숨소리 가득 다가옴

하늘이 와서 몰래 글씨를 쓴다

풀잎을 동그랗게 먹은
벌레 잎자리가, 바로 그 상처가
하늘의 글씨다
당신 계시는 블랙홀들

길 밖에 더 큰 길이 있다.
     ―이성선 「하늘의 글씨」 

   김 석 환 (시인·명지대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