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9

시작 연습詩作鍊習

시작 연습詩作鍊習 洪 海 里  엊저녁 난바다로 무작정 출항한나의 백지선白紙船 해리호海里號거친 물결을 밀고 나아갔다 오늘 꼭두새벽빈배로 귀항했다 물고기 한 마리구경도 못한 채 험난한 바다에서 흔들리다파도와 달빛만 가득 싣고 축 처진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쓸쓸한 귀항나의 배는 허공 만선이었다.* 첫 시집『투망도投網圖』(1969, 선명문화사)의 표제시「투망도投網圖」를 압축함.  * 언제부터였을까. 허공만 채우고 돌아오던 것이.만선의 꿈으로 살면서 빈배가 되기 일쑤인 것이 "무작정 출항" 때문일까. 물때를 탓할 것도 아니요 성긴 그물코를 의심할 것도 아니다. 일종의 버릇이다.어두워지면 슬금슬금 나오는 물고기들의 유혹을 따라난바다를 헤매는 이.   그러고 보니 새벽녘에 잠깐 뭔가 스친 것 같다. 연필로노를 젓는 백..

정곡론正鵠論

* 솔개 : http://cafe.daum.net/howillust에서 옮김.    정곡론正鵠論  洪 海 里  보은 회인에서 칼을 가는 앞못보는 사내안 보이는데 어떻게 일을 하는지요귀로 보지요날이 서는 걸 손으로 보지요그렇다눈이 보고 귀로 듣는 게 전부가 아니다천천히 걸어가면보이지 않던 것언제부턴가 슬몃 보이기 시작하고못 듣던 것도 들린다눈 감고 있어도 귀로 보고귀 막고 있어도 손이 보는 것굳이 시론詩論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빼어난 시안詩眼이다잘 벼려진 칼날이 번쩍이고 있다.    - 월간《우리詩》2019. 12월호.  * 과녁의 한가운데를 일컫는 정곡(正鵠)이란 말은 활쏘기에서 나온 말이다. 과녁 전체를 적(的)이라 하고 정사각형의 과녁 바탕을 후(候)라고 한다. 그 과녁 바탕을 천으로 만들었다면 포후(..

대풍류

대풍류 洪 海 里   날 선 비수 같은 달빛이눈꽃 핀 댓잎 위에 내려앉았다달빛에 놀라 쏟아져 내리는 은싸라기그날 밤 대나무는 숨을 놓았다목숨 떠난 이파리는 바람에 떨고 대나무는 바람神을 맞아들여텅 빈 가슴속에 소리집을 짓는다그렇게 몇 번의 겨울이 가고 나면대나무는 마디마디 시린 한恨을 품어줄줄이 소리 가락을 푸르게 풀어낸다때로는 피리니 대금이니 이름하니제 소리를 어쩌지 못해 대나무는막힌 구멍을 풀어줄 때마다실실이 푸른 한을 한 가닥씩 뿜어낸다사람들은 마침내 바람 흘러가는 소리를귀에 담아 풍류風流라 일컫는다. - 시집『비밀』(2010, 우리글)       * 내가 내는 소리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숨을 놓고 지난 생각까지 다 말리는 것일 텐데, 한동안 푸르던 이파리의 환상을 놓지 못했다..

명자꽃

명자꽃 洪 海 里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던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 시집 『황금감옥』(2008, 우리글) * 명자꽃은 귀신을 불러오는 꽃이라는 말이 있다. 기억을 불러오고, 사람을 과거 속에 서성이게 하는 꽃. 그래서 옛 선비들은 명자꽃을 마당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기억 속으로 잡아끄는 꽃의 힘. 기억 속으로 잡아끄는 것들이 다만 명자 꽃뿐이겠는가. 시인은 원래가 몽상가들이다. 시인의 몽상은 하늘 안 어느..

가을 엽서

가을 엽서  洪 海 里   풀잎에 한 자 적어 벌레소리에 실어 보냅니다 난초 꽃대가 한 자나 솟았습니다 벌써 새끼들이 눈을 뜨는 소리, 향기로 들립니다 녀석들의 인사를 눈으로 듣고 밖에 나서면 그믐달이 접시처럼 떠 있습니다 누가 접시에 입을 대고 피리 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달빛을 맞은 지상의 벌레들도 밤을 도와 은실을 잣고 있습니다 별빛도 올올이 내려 풀잎에 눈을 씻고 이슬 속으로 들어갑니다 더 큰 빛을 만나기 위해 잠시, 고요 속에 몸을 뉩니다 오늘도 묵언 수행 중이오니 답신 주지 마십시오.  - 시집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열린 창가에서 편지 읽는 소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엽서 洪 海 里시월 내내 피어오르는 난향이 천리를 달려..

금강초롱

금강초롱 洪 海 里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 금강초롱 : http://blog.daum.net/j68021에서 옮김.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 시집 『독종毒種』(2012. 북인)    * 시「금강초롱」을 읽으면 ‘사랑’ ‘번민’ ‘고뇌’ ‘수양’ ‘인내’ ‘해탈’······ 등의 단어가 떠오르는데, 이런 단어에는 다분히 종교적 색채가 묻어난다. 금강초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