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13

말, 생채기로 뜨는 별 - 홍해리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에 부쳐 / 손현숙

말, 생채기로 뜨는 별 - 홍해리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에 부쳐 손 현 숙(시인, 문학박사) 한겨울이 지나가고 문득 고개를 드니 양지쪽 명자나무에서는 파랗게 물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그간은 또 어찌 지내셨는지요. 문안도 못 여쭙고 가을과 겨울이 공손한 바람처럼 지..

명자꽃

명자꽃 洪 海 里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던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 시집 『황금감옥』(2008, 우리글) * 명자꽃은 귀신을 불러오는 꽃이라는 말이 있다. 기억을 불러오고, 사람을 과거 속에 서성이게 하는 꽃. 그래서 옛 선비들은 명자꽃을 마당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기억 속으로 잡아끄는 꽃의 힘. 기억 속으로 잡아끄는 것들이 다만 명자 꽃뿐이겠는가. 시인은 원래가 몽상가들이다. 시인의 몽상은 하늘 안 어느..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洪 海 里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行과 행行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큰 바다를 시의 마을로 삼는 시인. 시의 바다에 영혼을 기투하는 시인. 말과 말 사이에서 말의 위의를 예인하는 시인. 洪海里는 기표다. 그것은 결코 기의일 수 없다. 그것은 말과 말이 역동하는 순수한 시말의 비등점이다. 그것은 시말의 소생점인 바, 행과 행 사이를 마구 요동쳐 “詩의 나라”를 꿈꾸는 시..

황태의 꿈

황태의 꿈 洪 海 里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우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운 나의 꿈 갈가리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가는 몸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 시집『비밀』(..

총명한 여성들이 바꾼 세상 /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동아일보 2018. 4. 23.)

<내가 만난 名문장> 총명한 여성들이 바꾼 세상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손현숙의 시 ‘공갈빵’의 한 대목이다.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 하던 봄날’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 오던 우리 아버지와 ‘눈이 딱, 마주’ 쳤더란다. 헐레벌떡 먼저 달려온 아버지는 ..

<서평> 치매, 황홀한 유리감옥! -- 홍해리 시집『치매행致梅行』/ 손현숙(시인)

&lt;시집 서평&gt; 치매, 황홀한 유리감옥! - 홍해리 시집『치매행致梅行』 손 현 숙(시인) 선생님, 뜨거웠던 여름도 가고 이제는 아침과 저녁에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해 질 녘, 뒷산을 산책할 때는 성마른 삭정이의 매캐한 냄새가 폐부를 관통하기도 하네요. 그림자도 한결 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