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122

<끝머리에> 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

&lt;끝머리에&gt; 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 나에게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시에 대하여, 시인에 대해 내가 나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꽃을 들여다보니 내가 자꾸 꽃에게 길들여지고 있다 꽃을 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아름답고 감미로운 꽃의 노래는 들..

<들머리에> 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를 위하여

홍해리 시선집『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를 위하여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이제까지 시와 함께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시 쓰는 일은 육체가 행하는 것처럼 영혼이 숨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행위이다 어떤 곡해나 구속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이념이나 주의도 필요없다 시 쓰기는 영혼의 자유 선언이다 시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늘 설레면서 한편으로는 한 편 한 편으로 완성되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시에서는 잘 익은 과일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은 잘 갖춰진 과일전과 같다 시는 호미나 괭이 또는 삽으로 파낸 것도 있고 굴삭기를 동원한 것도 있다.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무 살 냄새가 향긋하다 나무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나온다 목이 잘리고 팔이..

대풍류

대풍류 洪 海 里 날 선 비수 같은 달빛이 눈꽃 핀 댓잎 위에 내려앉았다 달빛에 놀라 쏟아져 내리는 은싸라기 그날 밤 대나무는 숨을 놓았다 목숨 떠난 이파리는 바람에 떨고 대나무는 바람神을 맞아들여 텅 빈 가슴속에 소리집을 짓는다 그렇게 몇 번의 겨울이 가고 나면 대나무는 마디마디 시린 한恨을 품어 줄줄이 소리 가락을 푸르게 풀어낸다 때로는 피리니 대금이니 이름하니 제 소리를 어쩌지 못해 대나무는 막힌 구멍을 풀어줄 때마다 실실이 푸른 한을 한 가닥씩 뿜어낸다 사람들은 마침내 바람 흘러가는 소리를 귀에 담아 풍류風流라 일컫는다. - 시집『비밀』(2010, 우리글) * 내가 내는 소리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숨을 놓고 지난 생각까지 다 말리는 것일 텐데, 한동안 푸르던 이파리의 환상을 ..

꿈꾸는 아이들

* 2012. 5. 5. 동아일보 주말 섹션에 게재된 손녀 서현.  꿈꾸는 아이들洪 海 里꿈속에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모두 투명한 날개가 달려 있어별에서 별로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아이들마다 눈에 별을 담아 반짝이고 아직 오지 않은 먼 내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귀는 꽃처럼 생겨 있었습니다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풀과 새들이 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름다운 시였습니다새들과 함께 꽃 속으로 들어가 놀고 있었습니다가슴에서 맑은 샘물이 솟고 있었습니다.향기로운 말을 쏟아내는 아이들 모두 시인이었습니다한평생 시를 쓴다는 내가 부끄러웠습니다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했습니다푸른 풀밭으로 굴렁쇠를 몰고 달리는 아이들손끝에서 지구가 뱅글뱅글 돌고 있었습니다비가 그친 풀밭에 쌍무지개가 피..

처녀치마

처녀치마 洪 海 里 철쭉꽃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송휘영의 야생화 편지 - 처녀치마 전년에 돋아난 잎이 시들지 않은 채 세찬 겨울 견뎌내며 상록의 잎 유지 3월말 꽃대 올라와 홍자색 꽃 피워 시간이 지나며 짙은 자주색으로 변해 중부 이북 산지서 주로 만날 수 있어 ‘절제’ ‘희망’ 꽃말이 ‘시골처녀’ 연상 ‘처녀치마’ 이름은 일본이름 잘못 번역 북한말 ‘치마풀’이 오히려 잘..

빨랫줄

빨랫줄 洪 海 里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나는 팽팽하게 걸린 지구의 마지막 힘줄, 맑은 날이면 햇볕에 반한 하늘도 내려와 옷을 벗는다 내게 매달려 펄럭이는 푸른 희망들 물에 바래고 햇빛에 바랜 깨끗한 영혼들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 늦게 돌아와 빨랫말미를 잡은 처녀들 신산한 속속곳들이 내게 와 매달린다 상처가 지워지듯 털어내는 집착이라는 병 가벼워질수록 빛나는 웃음소리로 바스락바스락 마르는 양말짝의 길 젖은 무게만큼 나는 황홀했다 그런 날 밤이면 내 몸도 출렁출렁 바람에 흔들린다 유성이 내려와 품에 안기고 칠흑의 밤은 깊어간다 바람도 잠든 한밤 눈을 뜨는 그리움처럼 마당에 빨랫줄 하나 하늘을 가르고 있어야 사람 사는 집이다. - 시집『독종』(2012, 북인) * 맑은 날이면/ 햇볕에 반한 하늘도 내려와 옷..

무화과

무화과無花果 洪 海 里 애 배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닌데 그녀는 왜 꼭꼭 숨기고 있는지 대체 누가 그녀를 범했을까 애비도 모르는 저 이쁜 것들, 주렁주렁, 스스로 익어 벙글어지다니 은밀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오늘밤 슬그머니 문지방 넘어가 보면 어둠이 어둡지 않고 빛나고 있을까 벙어리처녀 애 뱄다고 애 먹이지 말고 울지 않는 새 울리려고 안달 마라 숨어서 하는 짓거리 더욱 달콤하다고 열매 속에선 꽃들이 난리가 아니다 질펀한 소리 고래고래 질러대며 무진무진 애쓰는 혼뜬 사내 하나 있다.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에로스적 사랑은 무치無恥와 염치廉恥 사이에서 펼쳐지는 감각의 작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은 은일할 수도 있고, 아주 격렬한 유혹의 기표일 수도 있다. 성-자연이든 문명화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