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122

자귀나무꽃

자귀나무꽃 洪 海 里 1. 세모시 물항라 치마 저고리 꽃부채 펼쳐들어 햇빛 가리고 단내 날 듯 단내 날 듯 돌아가는 산모롱이 산그늘 뉘엿뉘엿 설운 저녁답 살비치는 속살 내음 세모시 물항라. - 시집『청별淸別』 (1989) 2. 꽃 피고 새가 울면 그대 오실까 기다린 십년 세월 천년이 가네 베갯머리 묻어 둔 채 물 바래는 푸른 가약 저 멀리 불빛 따라 가는 마음아 눈도 멀고 귀도 먹은 세모시 물항라. - 시집『투명한 슬픔』(1996)

연대기年代記

연대기年代記 洪 海 里 봄, 그 금빛 사태 아침은 강물소리로 열려 햇살은 금빛, 사태져 흐르고 죽음을 털고 일어서 열기를 더하는 가느란 생명, 짙은 호흡 겨우내 달아오르던 거대한 수목들의 뿌리며 몇 알 구근의 견고한 의지 단단한 밤의 안개를 털며 아픈 파도로 솟았다 청청한 구름을 날리는 하늘, 은밀한 눈짓에서 언뜻 틔어오는 달뜬 사랑의 비밀. 고요 속에 벙그는 다디단 꿈 온 세상은 불밝아 아지랑이로 타오르며 건강하게 웃고 있었다. 여름, 그 찬란한 허무 죽음을 앓던 고통도 허무도 뜨거운 태양 앞에선 한 치의 안개일 뿐. 또 하나의 허탈과 어둠을 예비하고 폭군처럼 몰고 가는 자연의 행진. 가을의 풍요론 황금 하늘을 위해 영혼의 불은 끝없이 타오르고 폭염으로 타는 집념의 숲 무성한 잎들의 요란한 군무소리, ..

우이동솔밭공원

우이동솔밭공원 洪 海 里 백년 묵은 천 그루 소나무가 방하착하고 기인 하안거에 들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무속 결 따라 신들의 궁전으로 가는 길 울려나오는 금강경의 물결도 숨죽이고 흐른다 수천수만 개의 푸른 붓으로 비경秘經을 새기고 있는 노스님의 먹물은 말라붙어 버렸다 땅속 천 길 이엄이엄 흐르는 천의 냇물이여 내 마음의 다랑논에 물꼬를 열어 다오 바람의 땅 낮은 곳을 따라 흐르는 온전한 물소리 잠깬 물고기 한 마리 날아올라 천년 세월을 면벽하고 나서 쇠종에 매달리니 바람이 와! 화엄華嚴의 춤을 춘다 무거운 침묵으로 빚은 야생의 시편들 눈 밝은 이 있어 저 바람의 노래를 읽으리라 귀 밝은 이 있어 저 춤을 들으리라 마음 열고 있는 이 있어 물처럼 흘러가리라 저들 나무속에 숨겨진 비경을 나 어이 독해하리 ..

둥근잎나팔꽃

둥근잎나팔꽃 洪 海 里 아침에 피는 꽃은 누가 보고 싶어 피는가 홍자색 꽃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고 가는 허리에 매달려 한나절을 기어오르다 어슴새벽부터 푸른 심장 뛰는 소리---, 헐떡이며 몇 백 리를 가면 너의 첫 입술에 온몸이 녹을 듯, 허나, 하릴없다 하릴없다 유성으로 지는 꽃잎들 그림자만 밟아도 슬픔으로 무너질까 다가가기도 마음 겨워 눈물이 나서 너에게 가는 영혼마저 지워 버리노라면 억장 무너지는 일 어디 하나 둘이랴만 꽃 속 천리 해는 지고 타는 들길을 홀로 가는 사내 천년의 고독을 안고,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언뜻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 『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 * 나팔꽃 : 까페- '세상속으로'에서 옮김. 아침에 피는 꽃, 저녁에 버리리 / 김 세 형 그렇다! 저 눈앞에 환..

명자꽃

명자꽃 洪 海 里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던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 시집 『황금감옥』(2008, 우리글) * 명자꽃은 귀신을 불러오는 꽃이라는 말이 있다. 기억을 불러오고, 사람을 과거 속에 서성이게 하는 꽃. 그래서 옛 선비들은 명자꽃을 마당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기억 속으로 잡아끄는 꽃의 힘. 기억 속으로 잡아끄는 것들이 다만 명자 꽃뿐이겠는가. 시인은 원래가 몽상가들이다. 시인의 몽상은 하늘 안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