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122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 찔레꽃

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찔레꽃 洪 海 里 너를 보면 왜 눈부터 아픈 것이냐흰 면사포 쓰고고백성사하고 있는청상과부 어머니, 까막과부 누이윤이월 지나춘삼월 보름이라고소쩍새도 투명하게 밤을 밝히는데왜 이리 세상이 환하게 슬픈 것이냐.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그 향기에, 빛깔에, 환심장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찔레꽃의 계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늦은 봄 들녘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는 찔레꽃, 가시는 왜 또 그리 날카롭고 많았던지 땔감으로 쓸 엄두도 못 냈고, 그래서 봄마다 더 무성히 들녘을 수놓곤 했었지요. 아마 지금쯤은 흰 꽃잎도 노란 꽃술도 장맛비에 다 이울고 겨울날 새들을 위해 열매들 살찌우고 있겠지요.  그 찔레꽃이 한때 저..

헌화가獻花歌

헌화가獻花歌 洪 海 里 그대는 어디서 오셨나요 그윽히 바윗가에 피어 있는 꽃 봄 먹어 짙붉게 타오르는 춘삼월 두견새 뒷산에 울어 그대는 냇물에 발 담그고 먼 하늘만 바라다 보셨나요 바위병풍 둘러친 천 길 바닷가 철쭉꽃 바닷속에 흔들리는 걸 그대는 하늘만 바라다보고 볼 붉혀 그윽히 웃으셨나요 꽃 꺾어 받자온 하이얀 손 떨려옴은 당신의 한 말씀 탓 그대는 진분홍 가슴만 열고. - 시집『投網圖』(1969, 선명문화사) * 홍해리 시인의 시적 출발은 현실세계에 대한 탐구보다는 심미적 세계의 가치 추구가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의 미의식美意識 은 현실적 가치와 심미적審美的 가치가 충돌한 경우, 때로는 비장 미悲壯美를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는 세계와 있어야 하는 세계를 조화롭게 보려고 하는 우아..

무위無爲의 시詩

무위無爲의 시詩 - 愛蘭 洪 海 里 너는 늘 가득 차 있어 네 앞에 서면 나는 비어 있을 뿐 ㅡ 너는 언제나 무위의 시 무위의 춤 무위의 노래 나의 언어로 쌓을 수 없는 성 한밤이면 너는 수묵빛 사색의 이마가 별처럼 빛나, 나는 초록빛 희망이라고 초록빛 사랑이라고 초록빛 슬픔이라고 쓴다 새벽이 오면 상처 속에서도 사랑은 푸르리니 자연이여 칠흑 속에 박힌 그리움이여 화성華星의 처녀궁에서 오는 무위의 소식 푸른 파도로 파도를 밀면서 오네. - 시집『愛蘭』(1998) * 노자 철학에서 가장 중추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은 “꾸미거나 속이거나 순리에 맞지 않게 억지로 하지 말라”는 뜻이다. 노자의 경전인 도덕경에는 無爲라는 단어가 수많이 등장한다. 특히 爲라는 한자를 거짓(僞)의 의미로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꽃여자 1~5

참꽃여자 · 1 洪 海 里 하늘까지 분홍물 질펀히 들여 놓는 닿으면 녹을 듯한 입술뿐인 그 女子. 참꽃여자 · 2 두견새 울어 예면 피를 토해서 산등성이 불 지르고 타고 있는 그 女子. 섭섭히 끄을리는 저녁놀빛 목숨으로 거듭살이 신명나서 피고 지는 그 女子. 참꽃여자 · 3 무더기지는 시름 입 가리고 돌아서서 속살로 몸살하며 한풀고 살을 푸는 그 여자. 눈물로 울음으로 달빛 젖은 능선따라 버선발 꽃술 들고 춤을 추는 그 여자. * 진달래꽃은 http://cafe.daum.net/rimpoet에서 옮김. 참꽃여자 · 4 긴 봄날 타는 불에 데지 않는 살 그리움 또아리튼 뽀얀 목의 그 여자. 안달나네 안달나네 천지간에 푸른 휘장 아파라 아파라 바르르 떠는 이슬구슬 그 여자. 참꽃여자 · 5 바람처럼 물길처럼..

첫눈

첫눈洪 海 里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부는지그 소릿가락 따라앞뒷산이 무너지고푸른빛 하늘까지 흔들면서처음으로 처녀를 처리하고 있느니캄캄한 목소리에 눌린 자들아민주주의 같은 처녀의 하얀 눈물그 설레는 꽃이파리들이 모여뼛속까지 하얀 꽃이 피었다울음소리도 다 잠든제일 곱고 고운 꽃밭 한가운데텅 비어 있는 자리의 사내들아가슴속 헐고 병든 마음 다 버리고눈뜨고 눈먼 자들아눈썹 위에 풀풀풀 내리는 꽃비 속에젖빛 하늘 한 자락을 차게 안아라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살아 생전의 모든 죄란 죄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머릿결 곱게 날리면서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사랑이여 사랑이여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온 세상을 무너뜨려서거대한 빛그 무지無地한 손으로언뜻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 시집『花史記』(1975..

난蘭과 수석壽石

난蘭과 수석壽石  洪 海 里    한때 나는 난초에 미쳐 살았다그때 임보 시인은 돌을 안고 놀았다 내가 난을 찾아 산으로 갈 때그는 돌을 찾아 강으로 갔다 내가 산자락에 엎어져 넝쿨에 긁히고 있었을 때그는 맑은 물소리로 마음을 씻고 깨끗이 닦았다 난초는 수명이 유한하지만돌은 무한한 생명을 지닌다 난을 즐기던 나는 눈앞의 것밖에 보지 못했고그는 돌을 가까이하여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의 시는 찰나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고그의 작품에는 영원의 향수가 향기롭게 배어 있다 한잔하면 나는 난초잎처럼 흔들리는데그는 술자리에서도 바위처럼 끄떡없다 난과 수석이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조화란 어떤 것인가, 차이는 또 무엇인가                        눈 밝은 가을날 석란화 한 점 가만히 들..

다시 가을에 서서

다시 가을에 서서  洪 海 里     샐비아 활활 타는 길가 주막에소주병이 빨갛게 타고 있다불길 담담한 저녁 노을을유리컵에 담고 있는 주모는루비 영롱한 스칼릿 세이지빛반짝이는 혀를 수없이 뱉고 있다그미의 손톱이 튀어나와어둠이 되고 파도가 되고 있다살 속 가장 깊은 곳에서석류꽃처럼 피던그미의 은빛 넋두리가드디어 하늘을 날고 있다이슬을 쫓는 저녁 연기도저문 산천의 으스름으로 섞여꽃잎은 천의 바다를 눈썹에 이고서른하나의 파도허허한 내 오전의 미련을부르르 부르르 경련을 하게 한다. - 시집『花史記』(1975, 시문학사)                    * 홍해리 시인이 서른한 살 한창 젊은 나이로 박재륜, 양채영 시인과 교우하며 충주, 청주를 배회하며 샐비어 꽃무더기 새빨갛게 와와~ 함성으로 활활 불타 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