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122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 옥계 바닷가에서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_ 옥계 바닷가에서 洪 海 里 바다가 파도로 북을 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두 쪽의 입술이었다 밤이 되자 별들이 하나, 둘씩 반짝이고 있었다 떠들썩하던 천년 소나무들이 바다를 읽고 있었다 달빛 밝은 우주의 그늘에서 두 쪽의 입술이 잠시 지상을 밝혀 주었다.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혼자서 우는 것은 곡哭뿐이다 ‘哭’에는 개 머리 위에 두 개의 입이 있다 이쪽은 저쪽이 있어서 운다 쪽쪽 소리를 내는 것은 존재를 확인하는 일 쪽은 색을 낼 때만 쓰는 것이 아니다. ― 시집『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 아마 ‘옥계 바닷가’의 밤 풍경인 듯하다. 세상은 잠들어 고요하나 하늘에는 별과 달이 다투어 빛나고, 밤바다는 파도로 일렁이며 밀려왔다 몰려가며 철썩대고 있었으리라. 사실 밤바다..

부채

부채 洪 海 里  한평생 바람만 피웠다  여름내 무더위에 몸뚱어리 흔들어 쌓다  살은 다 찢겨나가고 뼈만 남아  초라한 몰골 아궁일 바라보고 있다.-『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2017, 움)    * 이 시를 이해하는데 각별히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짧은 시를 접한 독자들은 대개 아, 중의적인 표현이 되어 있는 시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쩌면 젊어 바람만 피우다가 이제 노년에 기운이 다 빠져 폐기처분 직전의 바람둥이나 난봉꾼을 떠올리며, 뭐, 당연지사이지 하고 의미 있는 조소를 머금을 지도 모르겠다. 해석이 다양하다는 것이 이 장르의 커다란 장점이다.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시의 함축성은 큰 것이기에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이 시는 “바람→구멍→소리”의 이치에서 바로 ‘구멍’의 이..

석류石榴

석류石榴洪 海 里줄 듯줄 듯입맛만 다시게 하고주지 않는겉멋만 들어 화려하고가득한 듯텅 빈먹음직하나침만 고이게 하는얼굴이 동그란 그 여자입술 뾰족 내밀고 있는.- 시집『황금감옥』(우리글, 2008)    * 사물 혹은 여인의 향기 / 김석훈(시인 · 평론가)   사물은 마력의 산물이다. 사물은 하나의 우발적 생산물이 아니다. 사물은 읽기다. 사물은 느껴지는 존재다. 교감 혹은 조웅. 견자 혹은 통감 상상력 혹은 특발성. 시말의 펼침은 사물의 펼침이다. 감칠맛 나는 시말. 사물이 발하는 감각적 기호. 시말은 사물이 펼쳐내는 역동적 감각을 의미의 기호로 코드 변환시키는 말-사태이다. 날아오르는 상상력. 사물의 내면읽기. 사물과 시인의 이접 혹은 몽타주. 시인이 펼쳐내는 물질적 상상력은 이접된 사물을 이접시키는..

망종芒種

망종芒種  洪 海 里   고향집 텃논에 개구리 떼 그득하것다울음소리 하늘까지 물기둥 솟구치것다종달새 둥지마다 보리 익어 향긋하것다들녘의 농부들도 눈코 뜰 새 없것다저녁이면 은은한 등불 빛이 정답것다서로들 곤비를 등에 지고 잠이 들것다.- 시집『愛蘭』(우이동 사람들. 1998) ...................................................................   * 오늘은 63회 현충일이자 절기로는 망종이다. 현충일을 6월6일로 정한 이유는 우리민족의 세시풍습과 관련이 있다. 24절기 가운데 손이 없다는 청명과 한식에 사초와 성묘를 하고 망종에 제사를 지내왔던 오랜 전통에 근거하여 망종인 6월6일에 추모일을 맞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손이 없다’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