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94

<시> 장을 읽다

장醬을 읽다 洪 海 里 그녀는 온몸이 자궁이다 정월에 잉태한 자식 소금물 양수에 품고 장독대 한가운데 자릴 잡으면 늘 그 자리 그대로일 뿐---, 볕 좋은 한낮 해를 만나 사랑을 익히고 삶의 갈피마다 반짝이는 기쁨을 위해 청솔 홍옥의 금빛 관을 두른 채 정성 다해 몸 관리를 하면 인내의 고통이 있어 기쁨은 눈처럼 빛나고 순결한 어둠 속에서 누리는 임부의 권리. 몸속에 불을 질러 잡념을 몰아 내고 맵고도 단맛을 진하게 내도록 참숯과 고추, 대추를 넣고 참깨도 띄워 자연의 흐름을 오래오래 독파하느니 새물새물 달려드는 오월이 삼삼한 맛이나 유월이년의 뱃구레 같은 달달한 맛으로 이미 저만치 사라진 슬픔과 가까이 자리잡은 고독을 양념하여 오글보글 끓여 내면 투박한 기명器皿에 담아도 제 맛을 제대로 내는 장醬이여,..

<시> 물의 뼈

물의 뼈 洪 海 里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 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 시집『황금감옥』(2008, 우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