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가을 들녘에 서서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시집『푸른 느낌표!』(2006) <감 상 포 인 트> 가을 들녘에 서서 ―마음을 비우면..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먹통사랑 먹통사랑 洪 海 里 제자리서만 앞뒤로 구르는 두 바퀴수레를 거느린 먹통, 먹통은 사랑이다 먹통은 먹줄을 늘여 목재나 석재 위에 곧은 선을 꼿꼿이 박아 놓는다 사물을 사물답게 낳기 위하여 둥근 먹통은 자궁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도 어둡고 먹통..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은적암隱寂庵에서 洪 海 里 꽃 피며 피는 이파리도 연하고 고와라 때가 되면 자는 바람에도 봄비처럼 내리는 엷은 듯 붉은 빛 꽃이파리 이파리여 잠깐 머물던 자리 버리고 하릴없이, 혹은 홀연히 오리나무 사이사이로 하르르하르르 내리는 산골짜기 암자터 기..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가을 엽서 가을 엽서 洪 海 里 풀잎에 한 자 적어 벌레소리에 실어 보냅니다 난초 꽃대가 한 자나 솟았습니다 벌써 새끼들이 눈을 뜨는 소리, 향기로 들립니다 녀석들의 인사를 눈으로 듣고 밖에 나서면 그믐달이 접시처럼 떠 있습니다 누가 접시에 입을 대고 피리 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백..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설중매 설중매雪中梅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 방안, 매화, 소문 없이 눈 트네 몇 생生을 닦고 닦아 만나는 연緣인지 젖 먹던 힘까지, 뽀얗게 칼날 같은 긴, 겨울밤 묵언默言으로 피우는 한 점 수묵水墨 고승, 사미니, 한 몸이나 서로 보며 보지 못하고 적멸寂滅, 바르르, 떠는 황홀한 보궁寶宮이네. - 시집『..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밥 밥 洪 海 里 밥은 금방 지어 윤기 잘잘 흐를 때 푹푹 떠서 후후 불며 먹어야 밥맛 입맛 제대로 나는 법이지 전기밥솥으로 손쉽게 지어 며칠을 두고 먹는 지겨운 밥 색깔까지 변하고 맛도 떨어진 그건 밥이 아니다 밥이 아니야 네 귀 달린 무쇠솥에 햅쌀 씻어 안치고 오긋한 아구리에 소댕..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장을 읽다 장醬을 읽다 洪 海 里 그녀는 온몸이 자궁이다 정월에 잉태한 자식 소금물 양수에 품고 장독대 한가운데 자릴 잡으면 늘 그 자리 그대로일 뿐---, 볕 좋은 한낮 해를 만나 사랑을 익히고 삶의 갈피마다 반짝이는 기쁨을 위해 청솔 홍옥의 금빛 관을 두른 채 정성 다해 몸 관리를 하면 인내의 고통이 있어 기쁨은 눈처럼 빛나고 순결한 어둠 속에서 누리는 임부의 권리. 몸속에 불을 질러 잡념을 몰아 내고 맵고도 단맛을 진하게 내도록 참숯과 고추, 대추를 넣고 참깨도 띄워 자연의 흐름을 오래오래 독파하느니 새물새물 달려드는 오월이 삼삼한 맛이나 유월이년의 뱃구레 같은 달달한 맛으로 이미 저만치 사라진 슬픔과 가까이 자리잡은 고독을 양념하여 오글보글 끓여 내면 투박한 기명器皿에 담아도 제 맛을 제대로 내는 장醬이여,..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물의 뼈 물의 뼈 洪 海 里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 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 시집『황금감옥』(2008, 우리글)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황금감옥黃金監獄 황금감옥黃金監獄 洪 海 里 나른한 봄날 코피 터진다 꺽정이 같은 놈 황금감옥에 갇혀 있다 금빛 도포를 입고 벙어리뻐꾸기 울듯, 후훗후훗 호박벌 파락파락 날개를 친다 꺽정이란 놈이 이 집 저 집 휘젓고 다녀야 풍년 든다 언제 눈감아도 환하고 신명나게 춤추던 세상 한 번 있었던가 ..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
<시> 김치, 찍다 김치, 찍다 洪 海 里 싱싱하고 방방한 허연 엉덩이들 죽 늘어섰다 때로는 죽을 줄도 알고 죽어야 사는 법을 아는 여자 방긋 웃음이 푸르게 피어나는 칼 맞은 몸 바다의 사리를 만나 한숨 자고 나서 얼른 몸을 씻고 파 마늘 생강 고추를 거느리고 조기 새우 갈치 까나리 시종을 배경.. 詩選集『시인이여 詩人이여』2012 201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