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시집『금강초롱』(2013) 119

고추꽃을 보며

고추꽃을 보며 洪 海 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작고 보잘것없는 흰 꽃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어찌 저것이 밀애를 했나 푸른 고추를 달고 소리 소문도 없이 속에 하얀 씨앗을 가득 담는지 햇빛 쨍한 날 어느새 검붉게 피를 토하며 시뻘건 독을 모아 씨앗들을 노랗게 영글리는지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는지 참, 모를 일일세 허구한 날 하고많은 꽃 다 제쳐두고 오늘 내 네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버린 영혼을 네 매운 몸으로 비벼대고 싶어서일까 몰라 오랫동안 햇빛에 취한 너를 보며 내 홀로 골몰하는 것은 너의 우화등선 아니 수중 침전을 위해서인가 드디어 네가 죽어 눈앞이 환하다 세상이 시원하다 어, 시원해, 잘 익어 곰삭은 고추장 만세!